[LEGEND INTERVIEW] 신관웅, 재즈 피아니스트

‘대한민국 재즈 1세대’ 신관웅, 그는 1955년 국내 유일 정통 재즈 빅밴드를 처음으로 결성했다. 지금도 대중적인 음악이라 분류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전형적인 외국 음악으로 생소하게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클래식의 오케스트라와 같이 재즈에도 ‘빅밴드’가 분명히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재즈 불모지’ 대한민국에서 그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이런 그의 개척정신 덕분에 대한민국에서도 ‘재즈’라는 음악이 서서히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누구나 재즈를 쉽게 듣고 이해하며 다가설 수 있는 ‘재즈의 대중화’를 이뤄냈다. 레전드 매거진은 대한민국 제즈 1세대 피아니스트 신관웅을 만나 재즈와 함께 살아온 그의 인생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신관웅]

여러분, 안녕하세요. 신관웅입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활자매체와의 인터뷰를 갖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실 많은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오셔서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지만, 사실 인터넷 뉴스는 저와 썩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중장년층이다 보니 아무래도 인터넷 뉴스보다는 방송매체나 활자 매체에 더욱 익숙한 시대죠. 한마디로 늙었다는 얘기입니다 (웃음)

그런 와중에 이렇게 ‘레전드 매거진’이라는 문화예술인 인물 인터뷰 전문 매체가 새롭게 탄생되어 너무나 반가웠고, 또 저에게 인터뷰 요청을 해주시니 꼭 만나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겨 이렇게 여러분께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에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꺼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재즈를 했고, 뭐 그런 음악과 관련된 얘기가 대부분이었죠. ‘미 8군’으로 항상 이야기가 시작됐죠 (웃음)

반가운 활자매체에 제 이야기를 전하려 준비하다 보니 이번에는 조금 더 ‘인간 신관웅’에 대한 얘기를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아주아주 오래전 이야기부터 한번 시작해볼까요?

저는 말 그대로 시골 중에 시골, 완전히 고립된듯한 충청도의 한 벽촌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솔직히 하도 오래돼서 마을 이름도 잊어버렸죠 (웃음)

웬만하면 자기 태어난 곳 정도는 기억할 텐데 마을 이름조차 가물가물할 정도면 어느 정도 산골마을이었는지 대충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 시골 중에 시골에 아주 조그만 초등학교가 있었고 저희 아버지는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었습니다. 당시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는 동네를 대표하는 인재셨죠. 아버지가 계신 학교에 놀러 가면 저의 유일한 장난감은 풍금이었습니다.

처음엔 너무 할 게 없어 풍금을 밟아가며 ‘도~레~미~’ 소리를 하나하나 눌러가며 놀았죠. 악기란 생각도 못했고 저에게는 그저 소리 나는 장난감이었습니다. 그 ‘풍금’이라는 장난감이 제가 처음으로 연주한 건반 악기였습니다.

차츰차츰 이 풍금이라는 장난감에 점점 매료되어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난 야심한 밤에도 학교에 혼자 몰래 들어가 이 풍금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밝은 달빛에 의지해 이 풍금을 벗 삼아 놀곤 했죠.

이 세상에 피아노라는 풍금보다 더 멋진 악기가 있고, 또 그 피아노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라는 아주 매력적인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시작을 했죠.

처음에는 막연히 ‘나도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 꿈을 꾸기 시작했지만,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라 국민들 생활이 말이 아니었죠.

음악이라는 것은 미군부대 드나드는 장사꾼들이나 귀동냥으로 들을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생활은 음악을 즐기고 싶다는 상상조차 못 할 만큼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빴죠. 지금 생각해보면 하다못해 라면이라도 있었으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어려운 형편 속에 저희 아버지께서 당시에는 큰 병으로 여겨졌던 폐결핵까지 앓으시게 되며 저는 피아노라는 것을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꿈을 잊어버린 채 중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그 학교에 피아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베이비 피아노’라고 일반 피아노보다 한 옥타브 없는 피아노였지만, 저는 그 피아노를 보며 다시 제 맘속에 간직했던 꿈을 펼쳐야겠다 다짐합니다. 혼자 독학으로 공부했던 체르니 30번을 열심히 치며 피아니스트로서의 미래를 준비하게 되죠.

이렇게 음악에 빠져 지내다 보니 공부는 자연스레 게을러지고 대학시험에서 재수, 삼수를 거듭하던 저는 결국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됩니다. 그때 아르바이트로 찾은 일이 바로 미 8군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것이었어요.

당시에는 인력시장이란 게 크게 활성화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공사판 목수, 미장들처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만든 시장, 또 미싱과 재단 같은 기능공들이 모여 만든 시장, 주방장이나 주방보조 등 요식업 전문인력 시당 등 이런 인력시장들처럼 문예나 음악 등 예술분야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시장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미군부대 악사로 아르바이트를 갔는데 그곳에서 한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고 저는 정신을 잃을 만큼 그 연주 소리에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미군부대에 와서 연주를 할 정도면 이미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유명 뮤지션들이 거액의 출연료를 받고 오기 때문에 그들의 실력은 정말 대단했죠.

[한국전쟁, 그리고 한국 재즈]

‘한국전쟁’이 ‘한국 재즈’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돌 만큼 미군부대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재즈라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렇게 미군부대를 드나들며 재즈라는 음악을 배우게 되었죠. 이렇게 시작된 재즈는 위키리, 박일준, 패티김 같은 분들이 미군부대에서 공연을 하며 점차 한국에 정착하게 됩니다.

저는 재즈를 들으며 클래식과는 완전히 다른 리듬, 멜로디, 하모니를 익혀가며 재즈라는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그렇게 지금까지 재즈 피아니스트로 살아가고 있게 된 거죠. 사실 한국에서 재즈를 한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녹록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미군부대야 그들이 재즈를 알고 이해하니 그나마 편했습니다. 편한 정도가 아니라 우리 연주자들에게는 기회의 공간이었습니다. 당시 한번 연주를 하면 쌀 한 가마니 살 수 있는 돈을 받아올 수 있었으니까요.

비단 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켄터키 치킨, 캔맥주 등 당시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서양문화를 마음껏 체감하고 누릴 수 있는 신세계였습니다.

<사진: www.donmooreswartales.com>

물론 미군부대 연주를 하면서도 저는 한국 국민들이 이 즐거운 음악 ‘재즈’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한국 클럽에서도 공연하려 했지만, 당시 한국의 클럽에서 재즈 연주자로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죠.

그들은 재즈라는 음악 자체가 일단 돈이 안되고, 상당히 지루하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저희가 연주하는 재즈는 그들에게 음악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에 연주할 기회조차 찾기 힘들었습니다.

오죽하면 ‘동냥 피아노’라고 출연료나 대가 없이 무보수로 피아노를 치던 일도 허다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보수는 못 받지만 그저 피아노를 연습한다는 마음으로 동냥 피아노 연주를 이어간 적도 있습니다. 이 피아노가 기술이다 보니 우리는 우리의 기술을 연마할 장소가 필요했던 거죠.

지금 돌이켜보면 피아노 연주가 하나의 기술로 정착되며 오히려 발전해야 할 재즈가 더 발전하지 못한 옥쇄가 되었습니다. 서로 자신만의 연주기법을 쉽게 공유하지 못했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는 기술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으려는 욕심 때문인데 어쩌면 이는 당시로서는 당연한 이치였습니다.

연주할 장소는 없었고, 연주자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했던 것이 한국 재즈가 발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가장 큰 이유라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까지 ‘문글로우’라는 재즈바를 오랫동안 운영했던 것도 그 당시 재즈 뮤지션들이 설 수 없던 안타까움을 후배들에게는 물려주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최근 문을 닫기는 했지만 재즈 1세대와 젊은 뮤지션들이 함께 음악을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재즈를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재즈 1세대들은 문글로우에서 만나 다시 뭉쳤죠.

매주 목요일 공연을 하며 관객 분들께 우리의 재즈를 마음껏 들려드렸던 것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해전 같은 국가 차원의 혼란이 지속되며 대한민국의 경제마저 하락세를 치며 사람들은 점점 재즈를 즐기는 문화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혹자는 ‘서양문물과 돈에 눈이 멀어 미군부대를 들락거린 거 아니냐’라고 비아냥 거릴 수 있지만 그것은 겉만 보고 얘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미군부대에서 실력을 익힌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부대에서 공연을 한 사람들도 모두 색깔이 제각각이죠.

만약 우리가 미군부대에서 모두 한 가지만 보았다면 우리의 색깔은 천편일률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다양한 시선으로 다양하게 접근해 우리만의 색깔을 찾았고, 그런 노력들이 그 사람을 당대 최고의 예술인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신관웅, 그리고 K재즈]

너무 옛날 얘기를 오래 한 것 같아요 (웃음) 조금 분위기를 바꿔 지금의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일단 저를 포함한 우리 재즈 1세대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단호합니다.

우리가 어깨너머로 힘들게 재즈를 배우며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후배들에게만큼은 그 시간을 단축 시켜주고 싶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과 한 무대에 서서 그들을 돋보이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무대를 많이 만들어 가려하구요, 또 하나는 한국 재즈를 ‘K재즈’라는 하나의 문화로 정착 시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 후배들과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고요. 예전처럼 서로 자기의 기술을 숨기고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술을 공유하고 서로 더 빠르게 최고의 자리에 함께오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요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동인데, 바로 양로원이나 고아원에서 재능기부 봉사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재즈 1세대의 경우 아무 연습 없이 눈만 마주치면 바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50여 곡이 넘습니다. (웃음) 이런 재능을 살려 소외된 계층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 기쁨은 공유하는 장을 만들어가고 있죠. 5월 초에도 양로원 방문 일정이 잡혀있는데 그 어느 대형 공연보다 기대됩니다.

[마지막 메시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청년 여러분. 재즈라는 것이 조금은 낯설고 어렵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저의 인터뷰를 계기로 재즈와 한번 친해져 보세요. 여러분이 재즈와 친해지려 손을 내민다면 재즈는 언제든지 여러분의 손을 감싸 안고 깊이 있는 재즈의 세계로 인도해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재즈 1세대는 이런 재즈의 대중화를 위해 삶을 다하는 그날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재즈에는 명곡이 없습니다. 명연주자만 존재할 뿐이죠”

혹시 여러분이 재즈에 매료되어 재즈 뮤지션을 꿈꾸는 기회가 찾아온다면 이 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재즈는 여러분을 최고로 만들어줄 유일한 장르입니다.

대중음악에서는 아무리 연주자가 최고의 연주를 해도 가수의 목소리에 묻혀버립니다. 하지만 재즈는 여러분의 연주를 최고로 여기고 그 연주만을 위한 음악이 될 것입니다. 클래식 역시 수많은 연주자가 하나의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즈는 당신이 유일한 악기입니다.

당신을 가장 돋보이게 해 줄 수 있는 이 재즈라는 멋진 무대에 주인공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한국 재즈를 많이 사랑해주시고, 또 저희 재즈 1세대의 활동에도 아낌없는 응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