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INTERVIEW] 한지일, 꿈을 품은 Gentleman

한지일은 대한민국 모델이자 배우다.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2년 김수형 감독의 ‘바람아 구름아’로 영화계에 데뷔해 이두용 감독의 ‘경찰관’, 그리고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대한민국 대표 미남배우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대종상 신인상·남우조연상, 아시아 영화제 주연상 등을 거머쥐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1988년 영화 제작에 뛰어들어 100억 원대 부를 쌓았으나, 1997년 IMF 여파로 모두 잃게 된다. 그 후 2005년 미국으로 떠난 그는 현지에서 떠돌이 장돌뱅이(고국 향토특산물), 호도과자점원, 휄로쉽 데이케어(양로병원), 쥬얼리와 화장품 세일즈 등 13년 간 27개의 직업을 옮겨 다니며 외롭고 힘든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한국에서 한 호텔에서 8개월 동안 웨이터, 발릿파킹맨, 도어맨 등 3개의 일을 동시에 소화해 냈던 스물여덟 번째 직장을 최근 그만두고 스물아홉 번째 새로운 인생에 도전장을 내민 배우 한지일을 만나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던 그의 인생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들어봤다.

[한지일]

여러분, 안녕하세요. 너무 반갑습니다. 한지일입니다. 저를 이렇게 초대해주신 레전드 매거진에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 더욱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것뿐인데 너무나 많은 분들께서 응원해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요즘 너무 행복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명함에는 ‘사랑과 용서, 희망, 행복, 그리고 자살방지 전도사’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이 한 문장에는 파란만장했던 저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 도전의 시작은 정말 단순했습니다.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모델이라는 직업을 가지며 연예계에 데뷔했습니다. 지금은 작고한 모델라인 이재연, 모델센터 도신우와 함께 대한민국 모델 1세대였습니다. 당시 남성정장 브랜드, 유명 백화점 카탈로그 모델은 거의 독차지하다시피 했습니다. 여담으로 당시 신인이었던 강석우를 추천해 저와 함께 백화점 카탈로그에 실릴 수 있게 할 만큼 영향력도 있었죠. (웃음)

모델이라는 직업도 참 매력적이었지만 저는 조금 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더 보기 좋게 포장해 완곡히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당시 저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김수형 감독님을 만나 ‘바람아 구름아’라는 작품으로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되죠. 그 후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전성기를 누려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들만 찍는 대기업 광고를 찍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영화배우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던 저는 영화 제작자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게 됩니다. 흔히 ‘에로영화’라 불리는 성인영화를 제작하며 저는 또 한 번 승승장구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영화배우로서는 가질 수 없었던 엄청난 부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저의 부와 명예는 IMF와 함께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저는 삶의 희망을 잃은 채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제가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배신과 배반이 난무한 이 세상이었습니다.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에서 극 소수의 사람들만 만나며 외롭고 쓸쓸한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외로움보다 더 저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생계를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러시아 벌목공을 방불케 하는 고목 벌목에서부터, 블라이드 청소, 화장품 방문판매, 자동차 외판원, 그리고 마트 직원으로 저 하나를 살리기 위한 생존에 모든 것을 내걸었습니다. 그렇게 거쳐간 직업만 27개에 이르게 되었죠.

[한지일, 그리고 봉사]

저 하나 생각하기도 빠듯한 상황이었지만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는 한인 노인 요양원을 찾아가 그분들을 진심으로 위로해드렸습니다. 시카고에 ‘한마음봉사단’을 만들어 자살방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고요. 제가 ‘자살’을 막고자 노력하는 것은 저 역시 ‘자살’을 선택해 숨이 끊어졌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경험을 지금까지도 너무나 후회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도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게끔 돕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봉사를 이어온 지 어언 51년이 되었어요. 저의 이런 작고 소소한 행동이 국내에 알려지며 최근 신지식인협회로부터 ‘신지식인상 봉사상’을 받는 영예도 안게 되었습니다. 제가 받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상인 줄 알면서도, 저를 격려해 주시는 국민의 마음이 담겨있다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사실 제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요양병원’이란 말조차 생소했습니다. 하지만 13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에는 요양병원이 너무나 많았고, 그 병원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에 크게 놀랐습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들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시도록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습니다.

[한지일, 그리고 계은숙]

그리고 제가 한 가지 더 뿌듯한 일은 바로 계은숙이란 가수 분이 한국에서 다시 음반을 발매하고 활동을 재개했다는 소식이었어요. 저는 이 뉴스를 보고 정말 한참 동안 눈물을 흐리며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계은숙 씨가 마약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계은숙이란 분을 직접 만나 뵌 적도 없고, 그분도 저를 모르는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습니다. 다만 한국을 대표하며 일본에서도 국민가수급 인기를 누리던 대한민국의 여가수가 수감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들지 상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그 사연이 어찌 됐건 일단 이 분을 차디찬 교도소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죠. 당시 시카고에는 겨울이었는데, 저는 겨울 칼바람에 맞서며 한인마트 앞에서 계은숙 씨 구명운동에 동참한다는 사인을 일일이 받으러 다녔습니다.

그렇게 3,200명이 넘는 분들께서 저의 구명운동을 지지해주셨고, 많은 분들이 계은숙 씨를 지지해주셨기에 다시 국민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었다면 이런 기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저 역시 타지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인데, 한국 연예인이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일단 이 사람을 꺼내야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당시 구명운동에 동참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지일, 두 번째 졸업]

저 개인적으로 너무나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하나 더 일어났습니다. 최근 한국 벤처농업대학을 졸업한 일인데요,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52년 만에 다시 학사모를 썼기에 저 자신에게 더욱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또 1년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개근상 타기도 했고, 졸업생 148명을 대표해 우수학생상을 받아 더욱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특히 제가 학교를 다니며 놀라웠던 점은 각 분야 전문가로 이뤄진 한국 벤처농업대학의 교수진 모두 교통비는 물론 단 한 푼의 급여를 받지 않는 순수한 재능기부로 교육에 참여한다는 점입니다.

저도 재학하며 알게 된 것인데 이 대학의 설립자인 민승규 교수님께서는 대학 설립부터 운영까지 단 한 푼의 정부지원금을받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고 계십니다.

민 교수님은 지난 농림수산식품부 제1차관과 농촌진흥청장으로 재임하셨으며,매주 2~3일은 농촌 현지를 방문해 농민들이 직면한 문제를 직접 소통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농업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십니다.

[한지일, 그리고 독도]

제가 마지막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은 ‘독도’가 우리 땅임을 알리는 일입니다. 저는 일본에 건너가 현지에서 만나는 일본인들에게 사단법인 ‘우리문화가꾸기회’가 발간한 ‘일본 고지도 선집’을 보여주며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또 일본 현지 식당과 호텔을 일일이 방문해 ‘독도’가 한국 땅임을 알리는 내용을 담은 달력을 직접 나눠주기도 합니다.

사실 독도 홍보활동을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저는 어떤 식으로 할까 고민했는데 독도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우리문화가꾸기회’가 민간 차원에서 일본이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집을 만든 것에 놀랐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해 사무실로 찾아가 이훈석 대표에게 ‘독도를 알리면서 남은 인생을 뜻깊게 보내고 싶다’고 얘기했고, 이 대표 역시 저의 의지에 동참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이 대표로부터 전달받은 ‘일본 고지도 선집’과 달력을 들고 일본에서 독도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알리게 된 것이죠.

[한지일, 그리고 김대중가(家)]

또 저에 대한 회상을 하자면 저의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 가족과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을 거 같아요. 김대중씨 차남 홍업이와는 1968년 경희대 재학 시절 만났습니다. 저는 신문방송학과 신입생이었고, 홍업이는 경영학도로 서로 다른 건물에서 공부를 했는데 당시 제가 체육대학 선배들에게 혼쭐이 날 뻔한 것을 홍업이가 도와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저와 흥업이의 첫 만남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김대중씨 아들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지요.

당시는 3선개헌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높아가던 때라 캠퍼스에서도 시위가 끊이질 않았고 다수의 학생들이 이에 동조하는 상황이었어요. 저나 흥업이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다행히 저희는 ‘독재 타도’를 외치지않는 그야말로 순수한 차원이었습니다.

김대중씨 장남인 홍일이 형과는 정경대에서 함께 공부했기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홍업이와 나이 차가 두 살밖에 안되는데도 장남 특유의 위엄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홍업이가 형한테 대하는 태도는 항상 깍듯했고 홍일이형도 동생 친구들한테는 각별했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대중씨와 장남 홍일씨가 함께 구속돼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홍업이 또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제 거처에 홍업이를 숨겨줬는데 홍업이를 찾는 기관 사람들이 새벽에 불쑥 들이닥쳐 저희 집안을 들쑤셔 놓고 결국엔 홍업이를 찾아 데려간 적도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 홍업이는 김대중씨와 함께 도미하며 위기는 일단락 되었지만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철렁합니다.

[마지막 메시지]

자, 이제 어느덧 저의 이야기를 정리할 때가 왔네요. 저는 모델과 배우를 하며 구름을 타고 두둥실 떠다녀 본 적도 있습니다. 또 영화 제작을 하며 많은 돈을 만져 보기도 했죠.

지금의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한다면 저는 무조건 지금의 삶처럼 살아가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저는 돈보다 더 중요하고 값진 것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아마 저의 인생은 더욱 풍요롭고 가치 있었을 거라 후회하기도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지만 절대 돈을 기준으로 일을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미국 어느 마트에서 7,500불의 급여를 받으며 총매니저로 일하다가도 2,000불 받는 일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금전적으로 볼 때는 전자가 3배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로 보이겠지만, 저에게는 후자가 더욱 값지고 가치 있는 일이었기에 과감히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돈’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면 정말 나 자신에게 무책임한 선택이었겠죠. 하지만 저는 그 선택을 토대로 다시 당당히 일어섰습니다.

저는 최근 시니어 모델로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올 연말에는 큰 무대에 설 준비를 하고 있고요. 2007년 프랑스 코냑 ‘랜디 XO’의 모델을 했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당시 홍콩 최고의 배우 ‘주윤발’(周潤發)과 영화 철도원의 일본 국민배우 ‘다카쿠라 켄’(高倉 健) 등 거물들과의 경쟁에서 얻어낸 저 자신에게는 너무나 뜻 깊은 일이었습니다. 저 자신만의 또 하나의 신화를 써 내려가기 위해 지금의 삶에 충실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겪었던 과오를 후배들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후배 연예인들에게 성공한 후 건강한 마음가짐으로 성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언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비타민 엔젤’라는 신인 여성 걸그룹 친구들을 찾아가 강연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친구들에게 강조한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초심을 잃지 말고 겸손하라”. 연예인이란 직업으로 유명해지면 가장 힘든 것이 초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 초심을 잃게 되면 ‘겸손’도 잃게 되죠. 나에게 주어진 부와 명예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을 먼저 만들어야 그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담아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를 꿈꾸는 모든 분들이 그 꿈을 이루고 당당히 대중 앞에 섰을 때, 외모만 예쁘고 멋진 사람이기도보다는, 그 사람의 인성과 인품까지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마음이 아름다운 연예인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무대에 선다면 당신의 재능은 더욱 빛을 바랄 것이라 확신합니다.

비단 연예인을 꿈꾸는 분만이 아닌, 미래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모든 젊은이들의 꿈을 응원하고 그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전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습니다. 저 역시 많은 관심과 응원 여러분께 부탁드리며 이번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