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영, 음악감독/현(絃)편곡가

안녕하세요, 레전드 매거진 독자 여러분.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반갑고 영광입니다. 저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곡가, 현(絃)편곡가, 그리고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인영이라고 합니다.

영화 <피에타>, <관능의 법칙>, <표적>, <특별시민>, <형> 그리고 <창궐> 등에 작곡가와 음악감독으로 참여를 했고 수많은 가요 작업에 현악기 편곡으로 참여를 해왔는데요. 아무래도 제가 대중음악 현(絃)편곡 일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작곡가나 음악감독이라는 호칭보다 ‘현편곡가’라는 호칭이 가장 친숙하긴 하네요 (웃음)

제가 본격적으로 현악기 편곡을 시작한 것은 1997년입니다. 90년대는 대한민국 가요계의 중흥기이자 음악시장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데요, 물론 당시에도 ‘현편곡’이라는 분야가 있기는 했지만 요즘처럼 전문 현악기 편곡자나 현녹음 세션이 지금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해외에서 현악기를 녹음해 오는 일은 정말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죠.

1997년, 동물원의 ‘포스터’라는 곡을 시작으로 많은 곡에 현악기 편곡으로 참여했는데요.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참여한 곡들을 떠올려 보자면, 이수영의 ‘I Believe’, 윤종신의 ‘배웅’, 싸이(PSY)의 ‘챔피언’, 노을의 ‘붙잡고도’, H.O.T의 ‘Outside Castle’, 윤상의 ‘Back to the Real Life’, 김범수의 ‘보고 싶다’, 보아의 ‘My Name’, 이승기 ‘내 여자라니까’, 거미의 ‘기억상실’, 이승환의 ‘심장병’, 김윤아의 ‘야상곡’ 등이 있습니다.

2010년대 이후로는 김종국의 ‘한 남자’, 조용필의 ‘걷고 싶다’, 윤종신의 ‘너에게 간다’, 박정현의 ‘미장원에서’, 김동률의 ‘Replay’, 아이유의 ‘이름에게’, 윤미래의 ‘Because of You’, 소녀시대(태연)의 ‘비밀’, 성시경의 ‘두 사람’, 가인의 ‘카니발’, 싸이(PSY)의 ‘마지막 장면’, 레드벨벳의 ‘세 가지 소원’ 등에 현편곡으로 참여했습니다.

[박인영, 그리고 영화음악]

현편곡과 영화음악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영상을 위한 음악인지’와 ‘음악을 위한 음악인지’일 것입니다.

영화에서의 ‘음악’은 그 장면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거나, 배우들의 감정 흐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요. 음악이 너무 튀거나 혼자 앞서 나간다거나 하면 영상의 흐름에 오히려 방해되기 때문에 철저히 영상을 서포트 해주는 역할로써 존재해야 합니다. 즉, 음악이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되겠죠.

이 때문에 한 유명 영화음악 작곡가는 “영화음악은 벽지와 같아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집안을 장식하고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있는 듯 없는 듯’ 느껴지는 벽지에 비유한 건데요, 존재감이 없다는 말과는 확연히 다른 의미입니다. 이에 비해 대중음악은 영상과 관계없이 ‘음악만을 위한 음악’이다 보니, 아무래도 음악적 장르나 색깔에 구애를 받지 않고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향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점을 들자면 ‘작업의 호흡’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대중음악 작업은 조금 짧은 호흡으로, 영화음악 작업은 좀 긴 호흡으로 가게 됩니다. 아무래도 작업량이나 음악의 방향성이 조금 다르기 때문일 텐데요. 일반적으로 가요작업은 한 곡의 길이인 3분에서 5분 정도 안에 음악이 전하고자 하는 감정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잘 갖춰진 음악적 감각과 더불어 순발력이 필요합니다.

반면 영화음악 작업은 일반적으로 2시간 내외의 영화 전체를 아우르게 됩니다. 음악이 필요한 각 장면에서 영상을 서포트 하거나 장면과 장면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하는 등 전체적으로 영상과 좋은 결합력을 갖추기 위해 세세한 작업과 시간이 더 많이 요구됩니다.

영상의 흐름과 각 씬에 대해 이해하고, 그 영상이 필요로 하는 음악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파악한 이후 비로소 작곡 과정에 돌입하게 되는데요, 음악을 만들고 녹음을 하고 또 믹스를 마치는 데까지 보통 수개월 이상이 소요됩니다. 영화음악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를 수 있는 음악적인 능력과 함께 긴 시간 작업할 수 있는 지구력 또한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박인영, 그리고 대한민국]

대중음악과 영화음악 작업 이외에 지난해 저에게는 매우 특별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한국저작권위원회 요청으로 ‘애국가’를 재편곡하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2005년 안익태 선생님의 유족이 애국가 저작권을 정부에 기증했지만 악보 형태여서 음원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고, 기존의 애국가 음원은 저작권이 한국방송공사에 있을 뿐만 아니라 비영리 공익 목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새 음원의 제작이 필요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애국가를 재편곡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편곡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편곡 작업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한 나라의 국가에 손을 대는 작업이다 보니, 편곡을 시작하기 전부터 끝나갈 무렵까지도 재편곡 방향에 대한 엇갈린 의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결국 최대한 안익태 선생님의 원곡과 오케스트레이션의 의도가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조금만 더 현대 감각에 맞추어 변화를 주는 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70여 명의 서울 시립 교향악단과 40명의 서울시 합창단. 이렇게 총 110여 명이 녹음에 참여했는데, 첫 리허설 때 제가 편곡한 애국가가 울려 퍼지던 그 순간을 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2019년도는 독립운동 100주년이라는 큰 의미를 가진 한 해입니다. 애국가의 재편곡 작업뿐만 아니라 올해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음악 프로젝트 중 김연아와 하현우가 부른 ‘3456’ 이라는 듀엣곡에 현편곡으로 참여하기도 했는데요, 아무래도 주로 해외에서 거주하고 활동을 하다 보니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나라’에 대한 ‘존재’가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

저에게 있어 대한민국은 ‘엄마의 품’같은 존재입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벌써 편안하고 따뜻한 온기를 느끼곤 합니다.

[인간 박인영]

이제 음악가의 삶을 꿈꾸었던 시절로 잠시 돌아가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가정환경이나 성장 과정은 극히 평범했습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음악을 유난히 좋아해서, 동네를 지나다가도 음악 소리가 들리면 가던 길을 멈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머니께서 나중에 저에게 말씀해주신 건데 제가 6살 때쯤 동네 놀이터 앞 2층 집에서 자주 들려오는 소리를 많이 좋아했대요. 그때만 해도 저는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바이올린 소리였답니다. 제가 엄마 손을 끌고 가서 그 이층 집을 가리키며 ‘엄마, 저 소리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저거 하고 싶어요’라고 떼를 썼다고 해요 (웃음).

그렇게 배우기 시작한 바이올린. 저와 음악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님처럼 될 것이라는 꿈을 안고 5~6년 정도 바이올린에 몰두하던 어느 날, 가정 형편 때문에 더 이상 바이올린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형태로든 음악을 놓지 않고 계속하고 싶었어요.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기타를 잠깐 배웠는데, 유난히 손이 작았던 저로서는 ‘F코드’ 잡는 것이 어려워 기타에는 흥미를 잃고 금세 그만두었죠 (웃음). 중, 고등 학교 때는 교내와 교외 합창대회 때 합창 지휘를 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휘를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어떻게 대담하게 지휘를 할 수 있었는지 지금까지도 의아한 일이라 생각해요 (웃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클래식 작곡 공부를 시작했고 이어 대학에서도 클래식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대학교 전공 수업 과제였던 ‘클래식 기악곡’을 쓰는데 몰두하면서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관심이 있다 보니 우연한 기회에 창작동요제, 창작가곡제, 그리고 가요제 등에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창작하는 데 하나의 장르에만 국한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본격적으로 대중음악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1990년 열린 ‘제2회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 였습니다. 그 후 조동진, 김광석, 장필순, 한동준, 이승환, 윤상, 박정현, 윤종신, TOY 등 여러 가수의 공연에서 키보드와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이외에도 1992년에는 배우 윤석화 주연, 아놀드 웨스커 원작의 연극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 작곡가로 참여했고, 1999년에는 윤소정, 이정희, 윤석화 주연의 연극인 ‘신의 아그네스’에서 편곡과 키보드 연주를 맡으며 연극 음악 분야에서도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로 가요를 위해 해오던 현편곡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드라마, 영화, 그리고 게임음악 등 더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었는데 당시 작업물 중 게임 ‘LAQIA’(2003)는 작곡가 윤일상 씨와 함께 영국 London에서 오케스트라 녹음을 하기도 했습니다.

현과 오케스트라 녹음은 London 뿐만 아니라 New York, Melbourne, Prague, Tokyo, Los Angeles, Nashville 등에서 할 기회가 있었고 이를 통해서 더 많은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꿈은 포기해야 했지만 대신 현악기와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는 현편곡.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고 하고 싶어했던 현편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 현편곡 작업이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작곡가로서 작곡은 거의 하지 않고 현편곡 작업에만 너무 몰두한 탓이었을까요. 몸과 마음이 모두 많이 지쳐있기도 했고,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또 새로운 무언가를 하고 싶은 갈망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 2008년, 저는 뉴욕대(NYU) 대학원으로 영화음악(Film Scoring)을 공부하러 떠났습니다. 영화음악에 대해서는 아무 지식과 경험도 없던 저였지만, 항상 관심이 있었던 분야였고, 다행히 이전에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작곡하고 작업했던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 큰 어려움 없이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NYU Steinhardt 의 ‘Screen Scoring Programs’에서는 미디어 영상을 위한 작곡, 가상악기 사용법, 하이브리드 (hybrid) 오케스트레이션, 믹스, 스코어링 테크닉, 스코어 녹음 준비, 스코어 녹음, 그리고 뮤직 에디팅 등 영상 음악을 위한 전반적이며 총체적인 과정을 학습할 수 있었습니다.

NYU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재미있었고 기억에 남는 수업은 ‘Scoring for Film and Multimedia’라는 수업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영화 클립들 중, 2-5 분 정도 길이의 음악이 빠져있고 대사만 있는 클립에 음악을 만들어 보는 수업이었죠.

주로 기존 영화에서 발췌된 클립들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종종 NYU Tisch School 에서 필름 메이킹을 전공하는 미래의 영화감독들이 본인들의 작품을 가지고 이 수업에 참여해서 콜라보로 진행되기도 하는 등 아주 흥미로운 수업이었습니다. 이 수업은 특히 학생들이 같은 영상을 골라 작업을 하더라도, 서로 다른 시각과 감성, 해석으로 다양하게 표현된 음악들을 공유하고 토론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어요.

대학원 과정 전반에 걸쳐 제가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저를 지지하고 도와주셨던 교수님들도 저에게는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학과장 Ron Sadoff, 영화 <총알 탄 사나이>의 작곡자 Ira Newborn, Grammy Award Winner 인 Michael Patterson 등 너무나 훌륭하고 인자하신 분들이셨죠.

NYU에서 공부를 거의 마칠 무렵인 2010년에는 Ron Sadoff 의 추천으로 스페인 무성영화 ‘EL HOTEL ELECTRICO’에 제가 피아노 두 대를 위한 곡을 작곡하였고, 이 곡은 워싱턴 D.C. 에 있는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음악학자이자 지휘자인 ‘Gillian Anderson’의 지휘 아래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NYU 졸업과 동시에 뉴욕에 있던 프로듀서의 소개로 본격적으로 영화음악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저의 두 번째 영화 음악이었던 <피에타>(2012)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표적>(2014)은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영화음악과 팝 작업으로 뉴욕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저는 2015년 또 다른 꿈을 안고 영화 산업의 허브인 LA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LA로 건너온 후, 한국 대중음악, 미국 팝 음악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며 미국 영화 음악 작업을 하기 위한 만만찮은 준비에 돌입하게 됩니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하게 되는 자신과의 싸움은 늘 외로운 것이지만 그래도 LA에서 함께 작업하며 알게된 뮤지션 중 Clare Fischer의 아들이자 프로듀서, 작곡가인 Brent Fischer, 그리고 독특한 음악 색깔을 가진 작곡가 Victor Bellomo 는 음악뿐만 아니라 일상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좋은 친구가 되기도 했죠.

처음 LA 로 이주해 왔을 때 힘들었던 점 중의 하나는 녹음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이였습니다. 아는 뮤지션들도 거의 없었고 스튜디오나 엔지니어에 대한 정보도 너무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행착오 끝에 지금은 나만의 현악기팀이 생겼고, 녹음 공간이 매우 훌륭한 녹음실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또한 마음이 잘 맞는 엔지니어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점점 안정을 찾아가던 중, 뮤지컬 배우 홍광호 앨범에 프로듀서를 맡게 됩니다. 이 작업이 기억에 남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홍광호의 멋진 중저음의 목소리와 가창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누군가의 앨범을 프로듀싱한다는 일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것인지 혹독하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웃음)

뮤지션으로 살아가면서 또 한번의 잊지 못할 작업은 2017년 김동률의 앨범 녹음 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런던 심포니 (London Symphony Orchestra) 와 말로만 듣던 에비로드 (Abbey Road Studios) 에서 녹음하게 된 것이죠. 김동률의 ‘답장’ 이라는 미니 앨범이었고 그 녹음 현장은 제 인생에서 영원히 기억될 또 한 번의 멋진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2018년 저는 ‘창궐’의 영화음악을 녹음하기 위해 다시 한번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런던 심포니와 에비로드에서 또 한 번의 잊을 수 없는 녹음을 하게 되었고 저는 한국 영화음악을 위해 런던 심포니를 지휘한 한국 최초의 여성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 모자란 점도 많고 갈 길이 멀지만 그 당시에는 제 자신이 뮤지션으로서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서 조금은 뿌듯하고 각별한 감회가 있었답니다 (웃음)

이렇게 여러 분야를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제 자신을 저는 ‘하이브리드(hybrid) 작곡가’라고 부릅니다. 클래식과 영화음악을 공부하고, 그 음악적 지식을 바탕으로 대중음악과 영화음악, TV, 게임 등 멀티미디어를 위한 다양한 장르의 곡을 작업하기 때문이죠. 물론 요즘은 이러한 작곡가들이 많이 계시기도 하지만요.

[박인영, 그리고 사람들]

음악인으로 살아오면서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고, 저에게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모든 분에게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네요. 지금 이 순간 가장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 세 분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들려드리고 싶은데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바로 저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제 인생에서 그 누구보다도 특별하신 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 예술인 ‘음악’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음악적 이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감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정서적으로 좋은 감성을 쌓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음악을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도 좋은 음악인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직·간접적으로 늘 옆에서 힘이 되어주십니다. 사실 저희 아버지는 제가 음악 하는 것을 많이 반대하셨었는데, 어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음악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죠 (웃음) 그렇게 저희 어머니는 저를 끝까지 음악 교육을 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셨어요.

어머니의 이런 따뜻하고 온화한 마음은 비단 저만을 위한 특별한 혜택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진심으로 대하고 따뜻한 마음을 베풀며 살아오셨어요.

2017년에는 여든의 연세로 평생 힘들게 아껴 모아오신 돈을 ‘어린이재단’에 기부하기도 하셨어요.

어머니는 많은 고생을 하시고 예순이 넘으신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좋아하셨던 음악을 하고자 복지관에서 아코디언을 배우시게 되었어요. 아코디언 동호회원들과 함께 양로원과 보육원, 병원 등을 방문해 아코디언 연주회 등 공연을 다니시며 행복을 찾아가고 계십니다.

어머니의 얘기를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촉촉해지네요. 어머니가 저의 꿈을 이루어주신 크나큰 뿌리와 같은 존재라면 두 번째 고마운 사람은 바로 제가 음악인생으로 가는 길의 초입에서 저에게 길을 안내해준 음악인생의 ‘가이드’와도 같은 친구입니다.

바로 ‘더 클래식’의 박용준이라는 친구인데요, 이 친구는 제가 대중음악을 시작할 때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도 묵묵히 옆에 있어주는 든든한 친구입니다.

SM 엔터테인먼트가 삼전동에 있던 시절, 용준이의 도움으로 종종 SM 녹음실에 놀러 가곤 했었는데 그 시절에 녹음실이라고는 처음 가보는 저였던 터라 녹음 과정을 보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기회들을 통해 어깨너머로 대중음악에 대한 감을 조금씩 쌓아갈 수 있었고, 용준이에게 미디 프로그래밍도 배우면서 미래의 음악가 박인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네요 (웃음)

그 후 꽤 시간이 흘러 제가 현편곡자로 일을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어느 날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는데, 바로 이승환 씨였습니다. 박용준 본인도 현편곡을 잘하면서도 자기보다 더 잘하는 친구가 있다며 이승환 씨에게 저를 소개해준 것이었어요. 같은 분야에 있는 동료였는데 저에게 어떤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준것 같아 참으로 고맙고 힘이 되었지요. 앞으로도 서로 응원하면서 오래도록 함께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용준이 제 음악 인생의 ‘가이드’와 같은 존재였다면,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릴 세 번째 인물은 바로 제 인생의 ‘멘토’입니다. 바로 ‘윤상’씨 인데요, 이 분은 많은 음악인들이 좋아하는 음악인이시죠. 저 역시 윤상 1집이 나오기 전부터 훌륭한 베이시스트이자 작곡가인 윤상씨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왔었고 1집 앨범이 나온 후로는 완전 팬이 되었죠 (웃음).

시간이 흐르고 꿈에 그리던 윤상씨와의 작업을 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호주, 멜버른에서 현녹음 작업을 했는데 그것이 저의 첫 해외 현녹음이었죠. 이때 작업한 앨범이 바로 2000년에 발매된 윤상 3집 ‘Cliche’입니다.

그 이후 윤상씨는 유학을 떠났고, 저에게도 지속적으로 유학을 권유했습니다. 특히 배움의 중요성과 기쁨에 대해 강조하면서요. 이렇게 제가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가게 된 계기를 마련해주신 분이기도 하죠.

윤상씨는 늘 끊임없는 응원과 날카로운 비판으로 저를 성장시키는 고마운 분 입니다. 지금도 저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끝내거나 자랑할 일이 생기면 윤상 오빠에게 꼭 알리곤 하는데요. 그만큼 저에게는 음악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매우 든든한 지원군이자 멘토이십니다.

지금 제가 언급한 분들 이외에도 조동익, 한동준, 윤종신, 김동률, 그리고 유희열 등 그동안 많은 분의 도움과 응원이 있었습니다.

[박인영의 메시지]

저는 우선 올해 중반까지는 팝 음악 작업에 더 집중하게 될 것 같고요, 올해 중반부터 내년까지는 주로 영화, 다큐멘터리, 드라마 음악 작업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 대중음악, 한국 영화음악과 더불어 미국 팝 음악 작업과 미국 영화음악도 같이 해나가려고 합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한국 콘텐츠들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K-pop, 한국영화, 한국 드라마, 한국 예능 등 다양한 한국 콘텐츠가 미국 현지에서 리메이크되거나 제작 준비 중에 있습니다.

저는 한국인으로서 이런 현상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국가 브랜드의 성장에 대한민국 개개인 모두 자긍심을 갖고 더 발전된 삶을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이루지 못할 꿈을 꾸기만 하는 것보다는 ‘목표를 가진 꿈’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너무 많은 욕심만 가지고 미래를 계획하다 보면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씩, 대신 꾸준히 지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셨으면 합니다.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열정과 끈기가 있다면 언젠가 여러분이 원하는 목표에 많이 다가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었고요 (웃음)

그리고 ‘남을 이기는 것보다 자신을 이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과거를 능가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과거를 능가할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경쟁해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여러분 자신입니다. 저 역시 그렇게 노력하는 음악인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뮤지션으로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웃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행을 다녀온 듯해요.

정신없고 바쁘게 살아가는 와중에 이런 시간을 통해 저를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습니다. 다시 한번 이런 인터뷰 기회를 주신 사운드캣과 레전드 매거진에 감사드리고 또 인터뷰를 읽어주신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