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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END INTERVIEW] 대금 명인 원장현

일생을 대금과 함께한 당대 명인
원장현류 대금산조 창시자

‘원장현’

안녕하세요, 저는 대금 연주자 원장현입니다. 출생은 담양이며 원장현류 대금산조를 창시하였습니다. 현재는 금현 국악원의 원장으로 있으며 한국문화재재단의 음악감독이기도 합니다. 저의 고향인 담양은 대나무의 고향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선친의 젓대 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숙부 원광호 선생님의 권유로 열네 살때부터 대금을 시작했습니다. 일 년 열두 달을 매일 새벽같이 뒷산에 올라 해가 서산을 넘을 때까지 대금을 불곤 했습니다.

[스승의 은혜]

저에게는 평생에 걸쳐 은혜를 입은 스승님들이 계십니다. 수업료 한 푼 내기도 어렵던 시절 공부를 배우겠다며 찾아간 저를 이끌고 가르침을 주신 분들이시지요.

대금의 기초적인 것은 김용기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이후 전남으로 가 남도 향제 풍류와 삼현과 시나위를 오진석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살아계셨더라면 백삼십 세 가까이 되셨을 거예요. 그 뒤 서울로 올라와 김동진 선생님께 산조 공부를 배우고 마지막으로 한일섭 선생님께 갔습니다. 한일섭 선생님께서는 아쟁산조의 창시자이시며, 십 대 초반 시절부터 일찍이 소년명창이라는 말을 듣는 천부적인 예술가였습니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까지 제게 구음으로 대금산조를 가르쳐 주셨으며 원장현류 대금산조의 기틀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오늘날의 원장현이라는 사람이 존재하는가 싶을 정도로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선생님 건강이 몹시 좋지 않으셨어요. 바깥출입도 못하시고 집 앞의 마당만 왔다 갔다 하시던 상황에서도 제가 가니 그렇게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임종하실 때 제가 대구에 있었고 연락을 전혀 못 받았던 상황이라서 안타깝게도 한참 후에야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마흔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셨으니 살아계시면 연세가 90대 초반쯤 되실 거예요. 선생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오늘날의 한국 민속 음악에 엄청난 발전이 있었을 거예요.

제가 대금을 시작한 시기는 온 국민이 가난을 겪던 1960년대 중반입니다. 쌀이 다 떨어지고 보리가 새로 날 때까지 생계를 이어가기도 어려웠던 보릿고개를 겪는 시대에 예술을 한다는 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고,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는 필연인지는 몰라도, 대금이 저의 운명인 것 같습니다. 고생을 하면서도 대금을 한 것을 후회해 본 적도 없고,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53년째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앞만 보고,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배웠습니다. 당시에는 수업료를 드리고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선생님들께서는 제자가 되고 싶다고 오면 기꺼이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료들과 선후배들은 먹고살기도 힘든데 유별나게 대금 공부를 하냐고 이야기했었어요. 하지만 아랑곳 않고 전진하여 결국 그 경험들이 오늘날 저에게 엄청난 자산이 된 것입니다. 그걸로 인정을 받게 되고, 성공하게 되었지요. 스승님들께서는 저의 삶을 바로잡아 주시고 음악을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한 분 한 분 몹시 그립습니다.

[대금연주자의 삶]

1982년도에 전주대사습대회 8회 기악부에서 장원을 했어요. 이전의 대회에서는 저보다 연배가 10년 이상 높은 선배님들과 함께 했었지요. 그분들 누르고 상 타는 것이 목표라기 보다도 경험 삼아 나갔었어요. 대금을 전공했다고 해서 대금 하나만 배워서는 안되거든요. 다양하게 듣고 모든 장르의 음악을 섭렵해야 해요. 가야금, 아쟁, 태평소 등 다른 분야의 악기와 판소리 같은 것을 많이 들으며 저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아내서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요. 창작도 모방에서 나오는 것이니 좋은 것을 보고 들음으로써 발전이 되는 거예요. 어찌 보면 제가 선생님들께 가서 꼭 가르침을 받지 않더라도, 그분들 소리를 귀담아들으며 꼭 한번 저런 소리를 담을 수 있도록 연주해 봐야겠다 생각했던 것도 제 음악에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30대 후반에 생을 마감하신 안향련이라는 명창이 계세요. 그 분이 30대 초반에 남긴 음원이 지금 CD로도 나와있는데, 그분의 소리가 제게 음악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 중 한 분이시지요. 기악을 하면서 판소리를 관심 있게 즐겨듣고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본래 산조라는 음악의 모체가 판소리거든요. 판소리에서 좋은 곡들을 가져와 대금이면 대금에 맞게, 거문고면 거문고에 맞게. 악기 특색에 맞도록 만든 것이 오늘날의 산조에요. 쉽게 말해서 산조의 뿌리라고 할 수 있지요. 참 대단하다고 감탄하며 이런 분들 소리를 즐겨들었고, 한때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창극 단체 ‘여성 국극단’의 반주 악사로 다니며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효과음악을 만드는 일에 다양하게 참여했는데, 98년도에 발매했던 ‘날개’ ‘소쇄원’ ‘고향가는 길’ 같은 음악들이 당시에 반주음악과 효과음악을 하며 경험에 의해 쌓였던 음악들을 정리해서 CD로 발매한 것입니다. 사극 드라마 같은 걸 보면 중간에 나오는 아쟁 소리, 가야금 소리는 길어봐야 몇 십초인데 그런 음악을 내가 5분에서 7-8분 이렇게 길게 만드는거예요. 곡을 쓰는 것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하자면, 시를 쓸 때 기승전결법에 의해 쓰듯 음악을 만들 때에도 어법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듯 곡의 이치가 맞아야 하지요.

[후학 양성에 대한 철학]

제가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시절에 스승님들께 은혜를 입고 공부했으니, 이를 후학들에게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후학 양성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어요. 원장현이라는 사람은 한 시대에 얼마간 음악 활동을 하며 살다 가는 사람이니 다음 시대를 이어갈 제자들에게 제가 아는 것을 전하는 고리의 역할을 해야죠. 선조들께 받은 좋은 예술을 후학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고 가는 것이 한 세상 왔다 간 흔적이지요.

어렵게 공부를 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옛날에 우리가 공부할 때는 선생님들도 힘들게 사셔서 맘 놓고 배우고 연습할 공간이 마땅치가 않았어요. 단칸방에서 셋방 살이하면서 대금을 불면 동네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죠. 그래서 저는 연습장소가 산 아니면 들판이었어요. 산에 새벽같이 운동 삼아 올라 연습을 하며 내공을 쌓았지요. 나중에 여유가 생겨서는 저에게 배우는 사람들이 맘놓고 연습할 수 있는 장소, 수업료에 큰 부담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혜택을 주고 싶었습니다.

1988년도에 삼청동 화동에 집을 개방하여 열쇠 없는 집으로 만들어 저에게 공부를 배우는 사람들은 항시 누구나 들어와서 연습을 하고 갈 수 있게 했어요.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에게는 수업료를 안 받기도 하고요. 저는 지금까지 제 입으로 수업료가 얼마니 얼마를 가져오라고 말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안 할 생각입니다. 집안 형편에 따라 수업료가 무리일 것 같으면 수업료를 적게 내게 하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해요. 그리고 수업료를 안 내는 사람들에게는 제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수업을 해줘요. 어린 마음에 돈 안내서 수업 안 해준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봐서. 최대한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게 하고 어떤 식으로든 공부를 가르쳤어요.

그때 그 집은 교통이 안 좋았어요. 무더운 여름에 한참을 걸어와야 하고. 그래서 이왕이면 교통이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싶어 95년도에 지금 집으로 옮겼어요. 안국역에서 나와 조금만 걸어오면 이곳이에요. 우리 지하실이 온돌로 되어 방이 다 뜨뜻합니다. 학생들에게 연습하고 잠도 마음대로 자고 가라고 해요. 아무튼 간에 제가 배웠던 것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저보다 훌륭한 제자들을 양성했을 때 원장현이라는 이름은 더욱 빛나겠지요. 제가 제자복이 많아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어요. 앞으로 그들도 후학들을 잘 이끌어 가면서 살아가겠지요.

[국악계의 시대적 변화와 대중화에 대하여]

1960년대 중반에 대금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전공자, 취미로 배우는 자 할 것 없이 대금을 하는 이가 손가락으로 세아릴 정도로 적었어요. 지금은 전공자도 많이 생기고 취미로 하시는 분들도 전국적으로 몇만 명 계시는데 그만큼 숫자가 많아진 거예요. 그렇다 보니까 대학을 가서 전공을 하고 졸업해도 취직이 안되고, 여러 가지로 생활이 힘든 사람들도많아요.

그렇지만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전통음악에 관심을 갖는 나라가 드물어요. 국립, 도립, 시립 등 악단들이 다양하게 많지요. 제자들에게 항시 하는 이야기는 잘 하면 기회가 온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대금을 잘하는 사람을 뽑으려고 하면 지원자는 수백 명이 오는데, 제대로 잣대를 들이대면 마음에 드는 사람은 한두 명도 없는 거예요. 옛날에는 녹음기도 없어 선생님 소리를 음원에 담아 들어볼 수도 없고, 산조 음악은 특히 악보도 없고. 그런 악조건속에서도 공부를 배웠는데 요즘에는 경제적으로도 옛날보다는 좋고, CD도 들을 수 있고 악보도 다 볼수 있고 연주 영상도 찍을 수 있으니 옛날보다는 조건이 좋잖아요. 그런데 정작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희망하고 꿈꾸고 있는 것들은 좋은 예술을 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좋은 예술을 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공부를 하라고 하죠.

한국 사람들이 전통음악과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것은 우리 음악인들의 책임이에요. 그들이 가까이할 수 있도록 우리가 연구해야 하는 거예요. 퓨전음악을 하더라도 내면과 바탕에는 우리 것이 깔려 있어야 하죠. 최첨단으로 살고 있는 현재도 우리가 먹는 것은 옛날식이잖아요. 구한말에 연해주로 이주해 살고 있는 한인들의 식성을 보면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밥을 접시에 서양식으로 담아 포크로 먹는다 뿐이지 된장국 끓여 먹고, 물김치 담아먹지요. 자기 할아버지 때부터 먹던 것들이 백년의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거죠.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는 우리 내면에 이미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통문화를 반드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고, 쉽게 전해줘야 해요. 제가 만든 곡들 중 ‘날개’ 같은 노래들도 그러한 취지로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만들었거든요. 대금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도 의외로 좋아해요. 최근에 경찰청 강의를 다니는데, 강의를 하기 전에는 교무과 담당 직원이 수강생들 반응이 안 좋을까 봐 걱정을 했었어요. 그랬는데 요즘에는 내년에도 해주셨으면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건 아니고, 제가 경험했던 것을 쉽게 이야기해주거든요. 서양음악 열번 들을 것을 우리 국악 두서너 번만 관심 있게 들으면 우리 것은 금방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죠. 우리 교육체제는 서양 위주의 음악을 가르쳐요. 우리 음악은 국악이라 하고, 서양음악은 그냥 음악이라고 하잖아요. 미술은 반드시 서양화, 동양화. 이렇게 붙여지는데 말이에요. 강의 취지가 그거였어요.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으면 해요.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와닿을는지는 앞으로 지켜봐야지요.

인터뷰 전문은 레전드매거진 8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