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매거진

라이프스타일 문화예술인터뷰지

[死者와의 인터뷰] 루이 암스트롱

재즈 역사에 남긴 깊은 발자취
루이 암스트롱

새치모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루이 다니엘 암스트롱(Louis Daniel Armstrong)은 미국의 가수이자 재즈 음악가로서 반세기에 걸친 활동을 통해 많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트럼펫 연주자 겸 가수로서 일찍이 리프(riff: 재즈에서 솔로에 맞추어 연주하는 즉흥적 성격의 짧은 기악 반주)의 기틀을 가다듬었으며, 1927년 이후 스캣(scat: 뜻이 없는 음절에 붙인 선율을 열정적으로 부르는 재즈의 즉흥 가창법)을 널리 보급하였다.
그는 트럼펫 솔로의 놀라운 표현에 곁들여 소박하고 개성적인 노래도 부르는 독특한 연기력과 기교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음악 세계는 재즈에서 파퓰러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으며, 음악영화에도 토키 초기부터 수없이 출연하였다.
그는 재즈 사상의 거인이며 희대의 솔리스트, 재즈 보컬리스트의 제1인자로 평가받는다.

死者와의 인터뷰 by 송태영

안녕하세요.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 트럼페티스트 루이 암스트롱 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스스로 레전드라고 말하기엔 부끄럽고, 그냥 재즈를 좋아 하는 트럼펫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입니다.

루이 암스트롱 님은 입과 관련된 별명이 많으시잖아요. 별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별명이 참 많은 편에 속하죠. 어릴 때 그리 유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면서 식탐이 많아졌고, 많이 먹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는 일이 많다 보니 그와 관련해서 별명이 많이 붙게 된 것 같아요. 가장 유명한 별명으로 사치모를 들 수 있겠네요. 입이 책가방만큼 크다고 해서 불리던 새철 마우 스(satchel mouth)를 줄여서 부른 별명인데 나중에는 제 연주 스타일을 지칭하기도 했답니다. 그 외엔 역시나 입이 하마 같다고 해서 붙은 디퍼마 우스(dippermouth) 도 있어요. 이것도 디퍼마우스 블루스라는 재즈곡으로 나왔다고 해요.

암스트롱 님은 어떤 유년기를 거치셨는지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가 태어났을 적의 1900년대 초 미국의 뉴올리언스는 아직 흑인 노예가 받아들여지고 있던 상황이었고, 저도 그런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났 답니다. 어릴 적엔 아버지가 바람으로 집을 나가버렸고, 어머니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어요. 아무래도 당시엔 어머니 혼자서 돈을 벌 방법이 매춘 외에는 없었기에 어머니의 고객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벌벌 떨기도 했었어 요. 학교 다닐 나이가 되어서는 집안 형편이 가난해 일을 했었는데 안 해본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신문배달부, 잔반 청소부, 석탄 배달부 등 육체노동 위주로 돈을 벌었었어요. 11살이 되어서는 학교를 중퇴하고, 그때부터는 또래 친구들과 중창단을 만들어 노래를 시작했답니다. 제 음악 인생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송년회 도중에 가는 해를 자축하는 의미로 총을 쏘아댔다가 신고로 소년원에 송치되기도 했었네요.

본격적인 음악인으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앞서 말한 중창단 활동을 하던 시절에 뉴올리언스에는 블루스나 재즈, 보드빌 쇼가 많아서 어깨너머로 쉽게 접할 수 있었답니다. 중고 코넷을 구입해 독학으로 연주를 하기도 했었고요. 그러다 소년원에 송치되었을 때, 당시 소년원에 교사가 음악으로 비행청소년을 교화시키려고 하셨는데 제가 코넷을 연주하는 걸 보고는 저에게 음악 교육을 시켜 주셨어요. 이렇게 음악을 배운 덕에 석방 후에는 낮엔 석탄 배달, 밤엔 코넷 연주로 돈을 벌기도 했었죠. 그 외에도 축제가 있을 때엔 뉴올리언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연주하던 ‘마칭 밴드’에도 참가하곤 했답니다. 그 과정에서 이후의 초기 재즈의 거물이 되는 벙크 존슨(Bunk Johnson), 키드 오리(Kid Ory), 버디 프티(Buddie Petit) 그리고 제 음악인생에 매우 중요한 후원자이자 동료인 킹 올리버(King Oliver) 등을 만나 연주 경험을 쌓을 수 있었어요.

프로 악단에서 연주를 할 만큼의 실력을 쌓고 나서는 미시시피 강의 증기 선에서 선상 밴드에 속해 연주를 하고, 비번일 때엔 음악이론을 배우면서 지냈답니다. 그러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군항으로 지역 경제의 핵심이던 스토리빌이 폐쇄되면서 고향인 뉴올리언스가 침체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킹 올리버가 더 나은 수입을 위해 시카고로 옮겨 갔어요. 공석이 된 키드 오리 밴드의 코네티스트 자리를 제가 이어받았고 요. 그렇게 전문 음악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네요.

초기 재즈 연주자와 달리 다양한 지역으로 옮겨다닌 이유가 따로 있었나요?

무엇보다도 수입 문제가 제일 컸어요. 계속해서 음악을 하다 보니 악보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합주 위주였던 재즈밴드에서 솔로 연주로 유명해질 만큼 실력도 쌓였지만 뉴올리언스 전체의 불황이 계속되다 보니 저도 어쩔 수 없이 올리버를 따라 시카고로 넘어갔죠. 당시에 올리버는 ‘크리올 재즈 밴드’를 이끌고 있었는데, 그 밴드의 차석 코네티스트로 저를 영입하고 그의 첫 음반에도 참여시켰답니다.

하지만 크리올 재즈 밴드는 이미 구식 밴드 취급을 받고 있었고,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신예 밴드들의 참신한 공연을 보며 당시 아내였던 릴 하딘의 조언에 따라 구세대인 올리버와 결별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1924년 올리버의 밴드를 떠나서 뉴욕으로 넘어가 플레처 헨더슨이 이끌던 밴드에 입단했답니다. 그 과정에서 보다힘 있고, 강렬한 트럼펫으로 악기도 바꿨고요. 헨더슨의 밴드는 올리버 시절과는 달리 상당한 실력을 요구했었는데 다행히도 얼마 안 가 헨더슨 밴드에서 테너 색소폰 주자인 콜먼 호킨스와 함께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어 요.

‘루이 암스트롱과 핫 파이브’에서 첫 리더를 맡기도 하셨죠?

뉴욕으로 넘어가 헨더슨의 밴드에서 연주를 하던 시절에 릴이 보기엔 헨더슨 밴드도 올리버 밴드와 마찬가지로 한계였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 요. 그러면서 이제는 저 자신의 밴드를 이끌 때가 되었다는 조언을 받아들여 시카고로 돌아가 저를 리더로 하는 ‘루이 암스트롱과 핫 파이브’를 결성 했어요. 이때엔 밴드 구성에 드럼이 없었는데 당시만 해도 녹음 기술이 열악해서 드럼을 녹음하기가 정말 까다로웠어요. 그러다 보니 드럼을 넣어 도 작은 심벌이나 우드블록 같은 악기 정도만 사용했었거든요. 아무튼 밴드 결성 후 첫 음반 녹음을 진행했고, 다행히도 이 음반이 대박이 났었답 니다. 녹음 방식이 전자 녹음방식으로 넘어가면서는 저희 밴드에도 튜바와 드럼을 추가해 ‘루이 암스트롱과 핫 세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했었 어요. 이때부터는 재즈도 단체 합주 위주의 연주에서 기교와 실력을 가진 스타 연주자가 주도를 하는 형태로 변형됐고요.

뮤지션으로서의 성공과는 별개로 연애사에선 많은 굴곡을 겪으셨어요.

아무래도 사생활에 대해서는 그리 안정적이지는 않았네요. 결혼도 4번이나 했었으니까요. 첫 결혼은 1918년 키드 오리 밴드에서 코네티스트로 영입되던 시기였어요. 그 당시에 뉴올리언스 근처의 그레트나에서 만난 데이지 파커와 첫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별거에 들어갔고 이혼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1924년에 앞서 말한 릴 하딘과 결혼을 했어요. 리 하딘은 제 음악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줬지요.
하지만 1920년대 후반 무렵부터 릴은 점점 다른 연주자들에게 밀려 들러 리가 되어갔고, 저와의 관계도 점점 소원해지면서 1931년부터 별거를 하게 됐어요. 그렇게 1938년에 최종적으로 이혼을 하고, 알파 스미스와 바로 결혼을 했지만, 3번째 결혼도 첫 번째와 같이 아주 짧게 끝났네요. 4번 째이자 마지막으로 루실 윌슨과 결혼 후엔 이전까지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생활을 청산하고 뉴욕 퀸스에 집을 지어 살았어요. 이곳에 자리 잡은 뒤론 이웃과 어울리며 그동안의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안락한 여생을 보낼 수있었습니다.

암스트롱 님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뮤지션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

재즈라는 장르가 당시의 흑인 노예 같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서 시작된 만큼 재즈는 자유 그 자체를 음악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분도 항상 재즈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