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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END INTERVIEW] 이치현

가수가 된 계기요? 운명이라는 말 이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있을까요.
남들 앞에 서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던 제가 가수가 되어 남들 앞에서 노래하고 있다니… 전 그저 생계를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가수가 되어 노래하고 있었어요.

낭만을 노래하는 영원한 집시
이치현과 벗님들의 프런트맨 이치현

안녕하세요 이치현 님 매거진 구독자분들을 위해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치현과 벗님들의 프런트맨, 7080 가수 이치현입니다. 78년도에 이치현과 벗님들이 라는 3인조 그룹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로 데뷔 하여 92년까지 그룹 활동을 하였고, 같은 해에 고별 콘서트를 갖으며 솔로 데뷔를 하였습니다. 데뷔는 70년대 말이지만 80년대 중반에 전성기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7080과 8090의 중간쯤에 위치한 7080의 막내뻘 되는 가수입니다.

이치현과 벗님들은 올해로 데뷔 41주년을 맞이 하셨죠?

정확한 기준을 첫 음반 발매로 하느냐 무명시절 생활부터 세느냐에 따라 조금 다르겠 지만 첫 음반을 기준으로 해도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무명생활을 기준으로 한다면 더 늘어나고요.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중학교 때는 미술을 전공하셨고 고등학교 땐 플루트를 전공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사내아이 다섯 명이 있는 집이 얼마나 시끄러 웠겠어요. 부모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죠. 찌개를 끓여두면 우르르 달려들어 게눈 감추듯 사라져 버리고, 다섯 명을 줄줄이 학교 보내야 하니 옷이며 도시락 준비로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런 가정의 막내다 보니 옷이며 양말을 물려받는 건 예사고 교과서를 물려받기도 했어요. 새것이라곤 꿈도 못 꾸었죠. 그런 제가 미술을 좋아하게 된 건 큰 형님의 영향인데, 큰 형님이 미술을 전공하셔서 저도 자연스럽게 미술학도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어릴 땐 미술을 곧잘 해서 상도 많이 받을 정도였 어요. 그러니 고등학교 역시 미술을 위해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지망하였는데, 당시 경쟁률이 50:1이었고 아쉽게도 낙방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2차 지원으로 서라벌고등학교에 지원하 였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됐죠. 신문에는 서라벌 예고라고 표기가 되어있었는데, 시험에 합격 후 입학하고 나니 인문계 학교로 바뀌어 있더라고요. 제가 입학한 올해 부터 인문계 고등학교로 바뀌는 건데 신문에 표기가 잘못되어 있던거죠.

소극장에서의 첫 공연은 어떠셨나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하신걸 보면 걱정과는 달리 성공적이었을 것 같은데…

저는 아직도 첫 무대의 떨림과 감동을 잊지 못하겠어요. 남들 앞에 서면 머리가 하얘져서 대본을 직접 준비했는데, 그 내용도 기억할 정도예요. ‘16년 만의큰 추위에도 공연에 찾아와 주신 관객 여러분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는 이치현과 벗님들이라는 그룹으로…’ 저희 공연 날이 마침 16 년 만에 큰 추위가 찾아온 날이었어요.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침이 찾아왔고 리허설을 위해서 공연장 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죠. 대학로는 텅 비어서 찬바람만 가득했 고, 사람은 커녕 사람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어요. 이따금 거리에 날리는 낙엽만이 전부였죠. 텅 빈 대학로를 가로질러 공연장에 도착하자마자 사무실로 찾아갔어요. 관객이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냐고, 대체 몇명이나 오는 거냐고 물었죠. 공연을 하는 것도 부담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 하는 소극장 공연인데 관객이 한 명도 없을까 불안하기도 했어 요. 그런데 공연을 기획한 박계백 씨는 실실 웃기만 하고 도무지 알려 주질 않더라고요. 답답한 마음에 그냥 대기실로 내려가버렸죠. 공연 시간이 다가왔고 관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한 줄에 10 명씩 앉았기 때문에 티켓 도우미가 10명씩 줄지어서 들여보냈는데, “10분 들어오세요, 다음 10분 들어오세요, 다음 10분 들어가실게 요… 다음 10분 들어오세요.” 관객이 끊임없이 들어왔죠. 그러다 나중엔 도우미가 “죄송합니다. 지금부터 앞에 방석을 깔겠습니다” 라며 방석을 깔고 관객을 계속 받았어요. 그땐 몰랐지만, 좌석과 무대 사이에 방석을 놓고 앉아서 보는 것도 소극장의 재미 중 하나거든요. 방석을 놓은 뒤로도 10명, 또 10명 계속해서 관객들이 들어왔어요. 도대체 얼마나 들어오는 건지 커튼을 들쳐 객석을 슬쩍 보니까 방석은 이미 무대를 침범해서 악기까지 저 뒤로 밀려나버린 상황이었어 요. 객석을 가득 채운 모습에 너무 놀라 심장이 쿵쾅거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공연이 시작되어 있었어요. 제가 멘트를 올려둔 보면대는 저 멀리로 이미 밀려나 버렸고 저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말들을 이어나갔죠. 차라리 노래하는 순간이 나을 정도였어요. 그러다 노래를 거의 마칠 무렵엔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걱정이 되고, 멘트랍시고 같은 말을 반복하다 다음 노래를 이어가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200명 정원에 380명이 들어온 공연이었고 공연 팀 중에 탑을 끊어버린 것이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첫 공연을 마친 저는, 관객과 연주자가 만드는 열기로 가득한 공간에서 관객과 연주자가 정말 코앞에서 마주하며 호흡하는 소극장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죠.

팬클럽 ‘늘벗회’와 꾸준히 소통하고 계시던데, 이 자리를 빌려 고마운 분들 에게 인사를 드려보는 건 어떨까요?

늘벗회는 대학생 7명으로 시작된 팬클럽으로, 늘 벗지라는 신문을 발행해서 여기저기 나눠줬던 것도 기억나네 요. 한때는 2000여 명까지 회원이 늘기도 했었는데, 삶에 치여 잠시 음악을 멀리하게 된 팬들도 계시고 그러다 다시 여유가 생기면 저희 음악을 찾아주시는 분들도 계신 덕에 현재도 1600여 명의 팬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하는 말이지만 항상 늘벗회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언제나 절 지켜봐 주시는 분들이 계신 덕에 나태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생 때는 눈만 마주쳐도 소리를 지르던 분들이 이제는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의 어머니가 되어서 인지, 실수나 잘못을 할 때엔 아주 따끔하게 비판해주시기도 하는데 그 덕에 현재까지도 나태해지지 않고 계속 반성할 점을 찾으며 발전할 수 있는 것같습니다.

이치현에게 있어 음악이란?

운명. 운명이라는 말 이외엔 달리 설명할 말이 없는 거 같아요. 어릴 때부터 음악을 너무 좋아하였지만, 기타리스트를 꿈꾸었지, 가수가 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어요. 남 앞에 서는 것을 죽기 보다 싫어했던 저인데,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제 자신을 보고 있자면 거스를 수 없는 삶의 각본이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이 들곤 해요.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를 빼놓을 수 없겠죠 장비에 관심이 많은 편이신가요?

기타리스트긴 하지만 기타가 그리 많지는 않아요. 일렉, 포크, 클래식 기타를 포함하여 10대 정도 가지고 있는데 요즘 나오는 악기엔 관심이 없어서 옛날 기타를 계속 쓰게 되는 것 같아요. 가장 아끼는 기타는 깁슨에서 나온 64년식 ES-335 할로우바디 기타인데, 원래는 이 기타도 그리 아끼는 기타가 아니었어요. 제가 기타의 값어치를 잘 모르고 있던 거였죠. 언젠가 일본에서 공연을 마치고 유명 악기점에 들른 적이 있어요. 몇천만 원짜리 빈티지 기타가 철제 케이스 안에 고이고이 모셔져 있어서 눈에 띄었죠. 그런데 그 기타가 제 ES-335와 똑같은 64년식에 심지어 색상까지 같은 게 아니겠어요? 호기심이 생겨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는데 쉽게 꺼내 주지 않더라고요. 매니저를 통해 한국에서 활동하는 가수라고 이야기하자 그제야 조심스레 꺼내 주더라고요. 그런데 기타를 잡아보니 연주감도 안좋고 소리도 영 별로인 게 제 기타만 못한 거예요. ‘아, 내가 보물을 썩히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고 그 뒤론 제 기타를 굉장히 아끼고 있어요. (웃음)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싱글 앨범도 발매 예정에 있고, 그 시기에 맞춰서 유튜브 채널도 운영할 계획이에요. 전 소극장 공연 문화를 이끌었던 만큼 라이브에 대한 애착이 강하거든요. 올해는 그걸 모토로 삼고 공연 위주의 한해를 만들어보려고 해요. 기운이 있는 이상 공연을 최대한 만들어볼 생각이에요.

인터뷰 전문은 레전드매거진 13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