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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END INTERVIEW] 강 수 호

드럼 사운드를 다시 쓰다
강 수 호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서 강수호라는 이름 석자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 이름은 어떤 이들에겐 믿음을 의미하며, 어떤 이에겐 편안함을 뜻하고, 그리고 연주자 사이에선 존경과 경외를 뜻하기도 한다.
1986년 평균율이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인지도를 쌓아나가던 강수호는, 돌연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떠나 7년 후 귀국하게 된다.
MI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엔지니어와 소통하는 드러머, 자신의 소리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나가는 드러머로서 그가 가져온 사운드 메이킹 능력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그는 세션 드러머로 2만여 곡 이상의 녹음에 참여하였고, 현재도 식지 않는 열정과 끝없는 연구를 통해 당당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드러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스스로를 아티스트가 아닌 그저 드럼 쟁이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하지만, 강수호가 대한민국 드럼 사운드에 불러온 선구자적 변화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전설이요? 전설이라면 한물 간 사람인 거 같잖아요. 전 전설로만 남고 싶지 않아요.
저는 아직도 부족함을 느끼고 드럼 연구에 계속 매진하고 있습니다.”


강수호의 드럼은 현재 진행형이다.

안녕하세요 강수호 선생님. 드럼계의 전설을 이 자리에서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드러머 강수호입니다. 음악 방송을 좋아하신다면 TV를 통해 절 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과분하게도 저를 전설이라 추켜세워 주셨는데, 전설이라고 하면 이미 지나간 사람들이 먼저 떠오르잖아요. 저는 현재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고 전설로 기억되기보단 끝까지 현역으로 남고 싶은 드러머입니다.

그간 2만 개가 넘는 곡 작업에 참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도 세션 녹음을 많이 하고 계신가요? 최근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근황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제 주된 직업이 세션 연주자인 만큼 한국으로 귀국한 1996년부터 현재까지 쉬는 날 없이 계속 녹음 활동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 다. 한때는 정말 눈만 뜨면 스튜디오로 출근해서 다른 일은 아무 것도 못하고 오로지 녹음만 해야 하던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앨범의 형태가 정규 앨범에서 싱글 앨범으로 많이 바뀌는 추세다 보니 음반 시장에서 세션 녹음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상황이에요. 그 대신 <나는 가수다>를 비롯해 연주자가 필요한 방송 무대가 늘어났고 크고 작은 공연이 많아져 여러 가지 일거리가 늘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녹음만 하던 시절이 더 좋았던 거 같아요. 매일 하나의 앨범에 집중하고 그것에 꽂혀있으니 더 깊게 몰두하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최근엔 그럴 기회가 줄어든 게 아쉽긴 합니다.

진부하지만 빠질 수 없는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나요? 성장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특출 날 것 없는 소년이었습니다. 그저 뛰어놀기를 좋아 하는 평범한 아이였을 뿐, 음악에 관심이 많지도 않았고 음악적 재능이라곤 결코 찾을 수 없었어요.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하게 된 것도 고등학교 무렵이었으니 빠르다고 말하긴 어렵죠. 그래도 성장 과정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저희 형으로부터 받지 않았나 싶어요. 형과는 8살 차이가 나는데 형이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둘이 같은 방을 썼기 때문에 형이 틀어 놓은 라디오를 싫건 좋건 들을 수밖에 없었죠.
그때는 별 관심이 없어서 흘려 들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들었던 음악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제 음악의 뿌리가 그 당시 들었던 음악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정작 그때의 저는 관심이 없었지만 무의식적으로 제게 흘러들어온 음악들이 지금의 저 자신을 만드는데 일조한 셈인 거죠. 그 당시 형은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CR), 레너드 스키너드 (Lynyrd Skynyrd), 스틱스(Styx)등의 70년대 클래식 락, 프로그레시브 락이 막 태동하려고 하던 그 시절의 음악들을 즐겨 들었습니다. 핑크 플로 이드도 그 싹을 틔우기 이전의 음반들이었죠.

그렇다면 드럼에는 어떻게 빠지게 되셨나요? 그 당시는 그룹사운드가 대중적이지 않던 시대일 거 같은데…

처음부터 드럼을 치진 않았어요. 악기를 다루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부 터인데 친구와 듀엣을 결성하여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음악에 입문하였죠. 그러다 드럼을 치기로 마음먹은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정말 우연히 드럼이란 악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바로 아래에 체육관이 있었는데, 거기서 종종 축제가 열리곤 했어요. 그날은 대학가요제를 하고 있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보니, 공연이 거의 마무리된 시점이라 아무나 들어올 수 있 게 문을 개방해 두었어요. 음악소리에 이끌려 들어갔는데 드럼이 눈에 확뜨인 거였죠. 휘버스(Fevers)라는 밴드의 공연이었는데 무대에서 조명을 받으며 드럼을 연주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드럼이란 악기에 크게 매료되었어요.

지금도 연습실을 따로 마련하는 게 아니라면 드럼 세트를 연습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더욱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요즘은 부모님이 자녀의 연습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고 대학 등록금까지 보태주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저희 때는 마땅히 연습할 공간이 없어서 바닥에 책을 놓고 두드리면서 연습하곤 했어요. 그것도 대놓고 하지 못하고 숨어서 몰래몰래 연습해야 했죠. 대다수의 부모님은 음악 하는 것을 반대 하였고 저희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크게 반대하셨어요. 연습하는 것을 걸리면 스틱이 부러지기 일쑤였고 심할 땐 두들겨 맞기도 했었죠. 그러면서도 음악을 했어요. 어쩌면 반발심으로 더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대학을 나오게 된 뒤 밴드 ‘평균율’을 결성하셨죠? 그때부터 이미 연습벌 레로 통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1986년에 부산에서 가장 음악을 잘한다고 친구들끼리 뭉쳐 ‘평균율’이 라는 그룹을 결성하였어요.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이승철, 변진섭, 박남정 씨의 라이브를 함께 하기도 하였죠. 하지만 동시에 정말 배고프던 시절이 기도 했어요. 평균율로 활동하며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은 저희는 서울에 집을 하나 구해서 합숙하며 지냈어요. 하지만 금전적으로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그룹 활동만으론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쉽지 않았죠.
그러다 운 좋게 ‘서울 음반’이라고 안양에 위치한 스튜디오의 연습실을 무료로 쓸 수 있게 되었어요. 걸어서 갈만한 거리는 아니었기에 차비만 생기면 무조건 연습실로 향했죠. 연습실 바로 옆에 다방이 있었는데, 제가 매일같이 연습실을 드나들다 보니 다방 주인아주머니와 많이 친해지게 되었 어요. 하루 종일 굶어가며 연습하는 제 모습을 보고 안쓰러웠는지 배고플때 언제든 와서 음식을 먹으라고 챙겨주시기도 했고, 건물 청소를 하시는 아주머니와도 친해지면서 그 아주머니도 절 위해서 도시락을 싸주시기도 하셨어요. 그렇게 2년 이상을 지냈었죠. 귀국 후 그분들을 찾아갔는데 그자리에 안 계셨어요. 꼭 보답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연습까지 매진할 수 있었나요? 배를 굶어가며 연습한 다니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아요.

제가 대학교에서 춤을 췄잖아요. 그 기간 동안 제 평생 놀거리를 전부 다놀았던 거 같아요. 그 뒤로는 노는 것과 완전 담을 쌓고 지내게 되었어요, 지금까지도요. 놀더라도 조용히 혼자 쉬면서 놀고 있죠. 어떻게 그렇게 했냐고 물어보면, 사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연습하는 것 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어쩌면 그냥 제가 좋아서 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싶어요.

오랜 시간 세션계에 몸담으신 만큼 세션맨에 대한 견해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과거에 세션맨은 고급 인력이었어요. 테이프 리코딩 시절엔 수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녹음은 아무나 함부로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고, 안정적으로 마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어요. 그리고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어야 했죠. 지금도 그렇지만, 댄스 가수의 앨범에도 발라드는 기본이고 록이나 라틴, 재즈 등의 음악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특성상 시장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장르별로 여러 연주 자를 섭외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그러니 모든 장르를 커버할 수 있는 검증된 세션맨이 필요하였죠. 그런데 요즘은 수정과 편집이 용이해졌기 때문에 그 벽이 많이 낮아졌고, 한 가지 장르만 잘해도 과거보다 찾는 자리가 많아졌어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음악 시장의 규모가 워낙 협소 하고 유행하는 장르가 편중되어있는 현실이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해요.

드럼 연주를 직업으로 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인가요?

매 순간. 항상 그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어요. 제가 늘 꿈꾸어오던 일을 하고 있고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물이라는 것이 행복해요. 만약 제가 드럼이 아니라 다른 악기, 다른 분야였다면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2만 4천여 개의 곡을 녹음하면서 한 번도 녹음에 소홀히 한 적이 없어요. 날 찾고 부른 사람이 실망을 해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계속 연구하고 게을러지기 않기 위해 꾸준히 연습하고 노력했고 현재도 노력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고 있어요. 그것이 제 성격이고 제 명예라고 생각해요. 제가 드럼 앞에 앉아있는 순간까지는 계속 그렇게 해나갈 거예요.

후배 연주자들을 위한 조언.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부푼 기대를 안고 들어온 신입생들이 “대학교도 고등학교와 별반 다를 게 없네”라며 실망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어요. 그리고 대학 과제나 커리큘럼에 치이며 “왜 개인 연습을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거지”라며 푸념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죠.

그런데 대학은 누군가에게 테크닉을 배우러 오는 곳이 아니에요.
자기 스스로 연구하기 위해 가는 곳이 대학이에요. 테크닉은 혼자 해도 충분해요, 정 안되면 유튜브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잖아 요. 레슨 자료는 널리고 널렸어요. 하지만 그런데선 방법론만 가르쳐주지 철학을 가르쳐주진 않아요. 그러니 대학에선 철학, 연주자로서 삶의 자세를 배웠으면 좋겠어요. 사람에겐 모두 똑같이 24시간이 주어지는데 연습하는 자세, 방법, 태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져요.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철학인 거죠. 고등학교와 다를 게 없다고 느낀다면 자신이 그대로인 것은 아닌지 의심 해봐야 해요.

인터뷰 전문은 레전드매거진 13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