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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스튜디오 파주

소리 기록에 충실한 예술공간
스튜디오 파주

소리로 한국의 지도를 그려본다면 어떨까. 지역 특산물의 이름이 아닌 지명과 소리를 지역을 대표하는 고유명사로 기록해보는 거다. 예를 들면 이천 쌀, 가평 잣, 강화 인삼 대신 변산반도 밀물, 삼척 원덕 갈남항의 갈매기, 임진각 망향의 노래 비 같은 단어들로 채워보자. 소리지도를 따라 떠나는 여행은 분명 흥미로운 여정이 될 것이다. 스튜디오 파주의 김영일 대표가 12년 전 강원도 평창의 동강 여울을 향하며 했던 생각이었다. 시작은 소박했으나 좋은 소리를 녹음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 급기야 DSD를 지원하는 고가의 시스템을 들고 진도 울돌목의 거센 파도와 소용돌이 앞에 서서 녹음을 하기에 이른다. 누군가는 비싼 장비가 파손될 것을 염려하기도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한국의 소리를 기록하는 것에 대해 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한 충분한 명분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국악 제작자로 나선 것도 한국의 소리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기록에 대한 사명감보다는 국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먼저였다. 1994년 소리꾼 채수정 씨의 공연을 눈앞에서 보며 알았다.
모차르트의 말마따나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은 시작된다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우며 유학길에 올라 긴 시간 공부해온 사진과 미디어 매체로도 대체될 수 없는 그날의 특별한 경험은 그를 소리의 세계로 향하게 만들었다. 시야가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원체 집요한 성격에 타고난 노력파였던 지라 그날 이후로 25년 동안 국악 가곡을 찾아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녹음 원본을 만들었다. 그동안 그가 제작한 ‘정가악회 풍류Ⅲ-가곡’ 앨범이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음악상인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는 놀라운 일도 있었지만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국악을 몰랐다. 정확히는 한국인들의 무관심이었다. 포털사이트를 비롯해 대부분의 스트리밍 플랫폼과 매체에서 음악 카테고리의 메인은 케이팝이 차지하며, 국악은 보통 맨 하단에 위치해 있고 최신 국악을 듣기 위해서는 최신 음악 차트에서도 몇백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우리의 음악임에도 한참 뒷전에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심지어 유네스코 세계 인류 무형유산에는 국악이 여섯 개 등재되어 있다. 세계는 인정하는데 한국인들은 모르고 있기에, 누군가는 이 멋진 음악을 알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튜디오 파주는 이런 이유로 만들어졌다. 소리를 기록하기 위한 공간이었기에 설계와 외관 모두 오직 소리만을 염두에 두고 완성되었다. 외부의 소음을 철저히 통제하기 위해 창문을 만들지 않았고, 수직 매지가 없어 측면에서 봤을 때 벽면 한 축이 단면으로 읽힌다. 매지가 들어가지 않는 공간에는 그만큼 훨씬 많은 벽돌이 들어갔다. 파주에 정착해 이 공간을 만들고 스튜디오 전체를 설계하는 데에 2년 반 가까이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정식으로 오픈한 것은 햇수로 만 3년째. 스튜디오 운영이 사양산업으로 여겨지면서 하나 둘 문을 닫고, CD를 듣는다면 마니아라는 말을 할 정도로 고음질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낮은 시대이기에 애초 상업성을 기대하고 만든 공간은 아니었다.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은 오로지 소리를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는 무결점의 기록 공간이었다. 그렇게, 국악의 자연음을 원음에 가깝게 오롯이 녹음할 수 있는 스튜디오가 파주에 세워졌다.

ㅣ 보존을 위한 방

AD/DD/DA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은 한국에 극히 드물다.
이 공간에서는 DXD 및 DSD256 등 초고해상도의 녹음과 마스터링이 가능하며, 과거에 릴 테이프에 녹음된 아날로그 포맷을 디지털화해서 현대의 DSD기반 데이터의 아날로그로 다시금 변환하는 작업이 가능하다. 2014년 발매된 故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리마스터 앨범은 이런 DSD 과정을 거쳐 아날로그 음반의 본고장인 독일로 갔으며, 커팅과 프레싱을 거쳐 LP로 완성됐다. 시설을 갖춰놓고 나니 이따금씩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유명 음반회사에서도 리마스터 앨범 작업의 문의가 들어오곤 한다. 스튜디오 파주의 복원기술은 풀 밸런스의 유지와 전체적인 색을 보여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최상의 조건을 자랑한다. 물론 이런 조건은 덤으로 온 것이 아니다. 케이블, 시스템, 자재 하나하나에 최상의 레퍼런스를 엄선해 바늘 끝자락만큼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던 김 대표의 노력이 있었다.

ㅣ 기록의 공간을 찾아

스튜디오 파주의 핵심은 기록이다. 물론 현존하는 모든 음악 전문 스튜디오가 소리를 기록하고 가공하는 것을 목표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 곳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아날로그 원음, 즉 어떤 사운드가 예술작품으로 탄생하기 이전의 자연의 소리를 가장 온전하게 기록하는 데에 집중하는 공간이다. 본래 김 대표는 강원도에 스튜디오를 만들 계획이었다. 각박한 도시에서 벗어나 작업실 문 밖으로 나서는 것 만으로 자연의 상쾌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스튜디오를 상상했다. 평창 일대에 적절한 공간을 만나 땅을 매입해 설계하고 토목공사를 진행하며 기뻐했던 것도 잠시, 그는 풍파를 맞이하게 된다. 조용하던 강원도 평창 땅에 풍력발전소가 들어오게 된 것. 발전기 두 개가 꽂히면서 발생한 공진만으로도 멀미가 났는데, 완공 시 열여덟 개가 더 꽂혀 스무 개가 한 쌍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내부 시설이 아무리 최고급이라 한들 문만 열고 나가면 거대한 공진의 소용돌이와 만나게 될 곳은 그가 애초에 머릿속에 그려두었던 자연 속의 스튜디오와는 거리가 멀었다. 관청의 허가를 받느라 바삐 움직인 시간들, 억대의 자비를 들여 계획하고 준비했던 시간과 노력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공중분해됐다. 소리 때문에 갔던 곳인데, 소리 때문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 결국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 진행하던 일을 무산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ㅣ 순수 원음의 기록, 퓨어 레코딩

김 대표는 본인이 하는 일을 아카이브(archive)로 묘사했다. 아카이브란 전산 소장품이나 자료를 디지털화하여 모아서 관리하는 저장고인데, 그가 정의하는 아카이브란 단어에는 최고의 순간을 최첨단의 기술로 기록해 보존하겠다는 결의가 담겨있다. 스튜디오 파주는 퓨어 레코딩 녹음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과 시설을 갖추고 있다. 김 대표가 정의하는 퓨어 레코딩이란 원칙적으로 후가공 없이 마이크, 연주자, 녹음기가 전부인 환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one-take)으로 녹음한 결과물을 의미한다. 녹음 기술을 쓰지 않는 것이 바로 기술 그 자체라는 것.
또한 가수가 무대 위 관객들 앞에서 목이 안 풀렸다는 이유로 공연 중간에 노래를 끊는 일이 없듯, 녹음도 마찬가지인지라 한 호흡으로 녹음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스튜디오에서도 최대치로 무르익은 실력을 발산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앨범의 가치가 본인에게도 타자에게도 납득된다는 철학이 담겨있는 것. 스튜디오 파주에서 퓨어 레코딩으로 녹음한 음반의 표지는 연주자의 사진이 정면에 배치되는 정제된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렇듯 정제된 양식을 취한 배경에는 보존가치에 대한 신념이 담겨있다. 창작음악에서는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표지에 변화를 주거나 새로운 디자인을 가미하는 것을 개의치 않지만, 정통 국악에 있어서 만큼은 정제된 커버를 입혀 대한민국 음악 계보에 가치 있게 기록될 음반의 시그니쳐로 삼겠다는 당당함이다.

ㅣ 공정음원 플랫폼 오대오 (odaeo.com)

오대오는 전통음악을 기본으로 한 사이트에서 시작해 현재는 클래식까지 장르를 확대한 고음질 음원 사이트다. 국악 레이블 악당과 클래식 레이블 오뉴월 뮤직에서 발표되는 앨범의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전통국악, 창작국악, 클래식, 퓨전 등 폭넓은 음악들을 고음질로 제공하고 있다.
오대오라는 사이트의 명칭은 수익배분의 공정성에서 유래했다. 일반적인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곡 하나를 판매했을 때 원곡의 저작자가 벌어 들이는 수익은 소비자가 구매하는 비용의 10분에 1도 되지 않는 현실이지만, 오대오 플랫폼에서는 한 곡을 900원에 팔면 원작자에게 450원이 돌아간다. 나머지 450원은 공정음원 플랫폼에 속한다. 말 그대로 수익배분이 5:5로 나뉘는 것이다. 수익배분을 공정하게 나눈 데에는 음악 인들에 대한 김 대표의 배려가 있었다. 구매료의 절반은 그들에게 돌아가야 차기작을 준비하는데 일말의 힘이라도 될 것 같았고, 어렵사리 노력해 만든 음원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라고도 생각했다. 오대오는 뮤지션들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해결하고자 만든 스트리밍 서비스의 대안책인 것이다.

ㅣ 한국의 소리, SOUND OF KOREA

누군가는 미친 짓이 아니냐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서라운드 마이크를 들고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급기야 수천만 원대의 DSD 레코더도 들고 갔다. 비싼 장비가 행여 물에 닿아 고장 나면 어떡하냐며 나무라는 이들도 있었지만, 한국의 소리를 고음질로 녹음해야겠다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었다. 출장을 마치고 스튜디오로 돌아오면 패닝과 볼륨을 조정해 오대오 사이트에 업데이트했다. 삼면이 바다인 나라지만 한국인들 대다수는 서해, 남해, 동해의 바다에서 나는 소리들을 쉽사리 구분하지 못한다. 그 소리들은 저마다 다른 생김새를 갖고 있다. 밀물과 썰물의 소리도 마찬가지다. 계절을 노래하는 새들의 지저귐도 지역마다 날씨에 따라서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곤 한다. 이런 소리들을 하나하나 좋은 음질로 녹음해 두고 싶었다.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치렀던 울돌목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렸다며 끄집어내 들려주었을 때, 단박에 그 장면과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을 만큼 진실함이 가득 담겨있는 소리였으면 했다. 그의 아카이브는 현재 진행형이 다. 지금도 틈나는 대로 사계절을 지나는 자연의 소리를 기록해 SOUND OF KOREA에 담아내고 있다.

<김영일 대표 인터뷰>

다독가입니다. 관심분야에 대한 참고서적들도 많이 읽지만, 먼저 그 분야의 기초 서적을 읽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미셸 푸코, 가스통 바슐라르의 고전 책을 좋아해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번역가 김현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걸 읽었어요. 미셸 푸코 같은 사람들을 알리는 데 있어서 한국인으로서는 선구자죠. 김현 선생님께서 제 삶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뵌 적은 없는데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사진을 공부했지만, 미국에서 공부를 해보니 사진에 대해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할 필요를 느꼈어요. 인류는 어째서 사진을 발명했고, 영상은 어째서 만들어졌는가. 내셔널 지오그라피는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돌아다니는가. 이런 것들을 공부하다 보니 한 가지 자명하게 깨달은 바가 있어요. 사진의 근본은 상을 따라다니는 것. 진실을 모방하는데 있어요. 내가 공부하는 학문은 진실을 모방하는 학문이라는 거죠. 그래서 인류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귀국 후에는 스물여덟에 군대를 가서 서른에 제대를 했죠.

세상의 유형은 끊임없이 변화하죠. 하지만 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정한 몇 가지 규칙 안에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키면서, 외부의 변화는 흡수해 저의 것으로 사용했어요. 세상을 따라잡고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세상의 정의만으로 살아간 적은 없어요. 만약 그랬다면 사업을 할 때에도 수익성만을 생각했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의 악당이반이 존재했을까요?

나를 귀하게 여겨야 상대도 나를 귀하게 여긴다. 시대가 교체되면 미디어 포맷도 변화하게 마련이죠. 과거의 것을 현재의 어법으로 바꾸는 작업을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지나간 시대의 기록을 현존하는 최상의 화질과 소리로 컨버팅해 보여주는 일은 그래서 필요한 거예요. 국악을 세상의 어법 중 가장 하이 레졸루션으로 보존하는 일에 대해 한국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어딘가에 모여 우리끼리만 우리의 음악이 좋다고 떠들어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많은 이들을 통해 좋은 가치가 공유되고 화자 될 때 비로소 오리지널의 가치는 올라갑니 다. 제가 스튜디오 파주에서 하는 모든 일은 가치에 대한 겁니다. 휘발되지 않을 시대의 기록을 지금 우리가 서있는 자리에 써내려 나가는 거죠.

인터뷰 전문은 레전드매거진 16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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