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INTERVIEW] 윤상

[윤상]

윤상은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이자 대학교수다. 상명대학교 ‘뮤직 테크놀로지학과’ 교수와 성신여자대학교 ‘현대 실용음악학과’ 학과장을 거쳐 현재 용인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 및 학과장으로 재임 중이다.

중학교 2학년, 삼촌에게 물려받은 클래식 기타를 계기로 음악과 작곡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충암고등학교 진학 후 같은 반 친구인 ‘김학인’과 함께 ‘페이퍼 모드’(PAPER MODE)라는 밴드를 결성했으나 대학 입시 등의 문제로 활동을 이어가지는 못했고, 결국 페이퍼 모드는 데모 테이프만 남기고 해체됐다. 윤상은 페이퍼모드의 데모 테이프를 신촌블루스를 비롯한 주변 음악인들에게 들려주었는데, 그중 가수 김현식이데모 테이프에 있던 곡 중 하나인 ‘여름밤의 꿈’을 4집 앨범에 수록하며 윤상은 정식으로 작곡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또 ‘추억 속의 그대’라는 곡도 1988년 황치훈의 데뷔 앨범에 수록되어 타이틀곡으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그 후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와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등이 연이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그는 스타 작곡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윤상은 당시 가수 김민우의 매니저였던 김광수(현 코어콘텐츠 미디어 대표)로부터 솔로 가수 데뷔 제안을 받고 1990년 첫 정규 앨범 1집을 발매해 90만 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며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이어진 92년 2집 Part.1은 100만 장 이상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에 힘입어 그는 학창 시절 몸담았던 밴드 ‘페이퍼모드’의 멤버 드러머 김학인, 보컬 노성원, 베이시스트 김범수(현재 아스트로 비츠 프로듀서) 등과 함께 2집 Part.2 를 발표하고 93년 겨울 입대한다.

1996년 1월 제대한 후 장기간의 공백을 깨고 비정규 음반 ‘Renacimiento’를 발표한다. 여기는 군 복무 이전에 선보인 자신의 곡들을 재편곡하고 미국, 이태리, 프랑스 출신의 객원 보컬을 섭외해 그 나라의 언어로 개사해 부른 버전을 수록했다. 같은 해 동갑내기 친구이자 동료였던 ‘신해철’과 함께 ‘노땐스’(No Dance)라는 프로젝트 팀을 결성해 앨범 ‘골든 히트’를 발매하기도 했다. ‘노땐스’는 테크노 음악을 기반으로 여러 형태의 곡을 선보였는데 테크노 음악으로도 얼마든지 실험적인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음반이다. 이때 그는 자신의 음악적 한계를 절실히 실감했고, 한국에서의 활동을 잠정 중단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Berklee College of Music에서 ‘Music Synthesis’ 학과를 졸업하고, 뉴욕 NYU(New York University) 대학원에서 ‘Music Technology’ 학과 석사과정을 마친다.

KBS 라디오 DJ를 시작으로 다시 국내 활동에 복귀한 그는 작곡가로서 다른 가수들의 음반 작업 외에도 방송 다큐멘터리 음악 등 더욱 성숙한 음악 분야에 도전하며 ‘윤상의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경험하며 직접 얻어낸 지식과 정보를 한국의 후배들에게 전하고자, 그는 현재 용인대 실용음악과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재임하며 대한민국 음악산업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레전드 매거진은 그의 소속사 ‘오드아이앤씨’에서 직접 그를 만나 음악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인생 이야기와 앞으로 펼쳐나갈 ‘인간 윤상의 미래’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음악가 윤상]

레전드 매거진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가수이자 작곡가, 프로듀서 윤상입니다. 이렇게 여러분께 인사드리게 되어 너무나 반갑고 또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레전드 매거진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처음 레전드 매거진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을 때 솔직히 저는 너무나 반가웠고 설레었습니다. 사실 이 각박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아날로그적 감성’을 담아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종이잡지가 있다는 것에 놀라웠습니다. 레전드 매거진의 존재 자체가 저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모든 음악인에게 큰 힘과 용기를 가져다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다 소화해내지 못하는 우리는 뉴스의 제목들만 읽기도 버거워졌죠. 결국 뉴스가 전하고자 하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고 고민하고 또 우리의 생각을 더해 분석하고 판단할 시간이 없어져버렸습니다. ‘여기 사고 났네’ 또는 ‘저 사람 저럴 줄 알았어’ 정도의 섣부른 판단밖에 내릴 수 없는 게 현실이죠. 이 편리한 환경이 가져다주는 ‘속도감’만을 즐기다가 정작 그 콘텐츠가 전하고자 하는 요점은 온데 간데 없어지는 것이 아닐지 조금 염려스럽기는 합니다. 이렇게 ‘디지털’ 시대는 우리의 생활환경뿐만 아니라 사상과 감정까지 빠르게 변화 시기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만큼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죠.

‘미디’와 ‘신시사이저’ 등 디지털 신호를 기반으로 음악을 시작했던 저 역시 놀라운 변화들을 실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콘텐츠를 제작하는 제작자뿐만이 아닙니다.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대중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과 영화 등의 콘텐츠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습니다.

제가 음악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은 서, 너살 때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음악 한곡을 듣기가 정말로 어렵고 복잡했죠. 요즘이야 휴대폰만 열면 음악이건 동영상이건 다 보고 들을 수 있는 시대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친척들 집에 가서 음악을 틀어달라고 하면 ‘조그만 녀석이 어른 부려 먹는다’는 농담을 하실 만큼 음악 한곡을 듣는 것이 쉽지 않던 환경이었습니다.

[소년 윤상]

사실 말로는 그러셨어도 조그만 아이가 음악을 틀어달라고 조르는 것이 기특하면서도 재미있으셨다고 말씀하셨어요. 삼촌 집에 가면 ‘비틀스’나 ‘폴 매카트니’ 솔로 앨범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누군지도 몰랐지만 그 음악을 들으며 ‘삼촌집에는 이런 음악이 있구나’ 기억했죠. 또 다른 친척집에 놀러 가면 ‘여기에는 이런 음악이 있어’라고 막연히 기억들만 하며 ‘음악’이라는 그 자체를 좋아했습니다. 당시 어린 저에게는 하나의 ‘놀이’였겠죠.

조금 나이가 들자 저는 부모님께 저도 집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 조르기 시작했고 결국 부모님께서는 ‘카세트 데크’를 마련해 주셨어요. 이 카세트 데크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라디오’를 실시간으로 녹음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라디오를 들으며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녹음해 무한 반복하며 듣고 또 들었습니다.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다는 건 지금까지도 습관처럼 하는 일입니다. 노래를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노래와 그 노래를 만든 사람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감상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음원 시대가 반가운 점은 예전처럼 테이프에 녹음하고 뒤로 감는 수고를 덜어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악을 더 쉽게, 더 자주, 더 오래 들을 수 있게 된 거죠.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인가 되었을 때 저희 어머니는 저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니 잘하겠다 싶은 마음이셨겠지만, 저는 첫날부터 자로 손바닥을 때리는 선생님이 밉고 무서워 하루만에 그만뒀죠.(웃음) 지금 돌이켜보면 저는 그저 음악을 듣는 것만 좋아했지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좋은 팝송 꽤나 듣고 외우던 저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이때부터 조금씩 그 음악에서 흘러나오는 기타나 건반 소리를 직접 따라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심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드럼, 베이스, 기타와 보컬이 필요하다는 공식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어요. 악기를 뭔가 하나 해보고는 싶은데 피아노는 자로 맞았던 기억밖에 없어 크게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죠.(웃음)

그런 찰나에 저희 삼촌이 고3이 되어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고, 삼촌이 치던 기타를 저에게 물려주셨어요. 삼촌은 공부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그냥 저에게 던져준 것이지만 저는 그 기타를 손에 쥔 순간 ‘이거다’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기타에 아무런 지식도 없던 저는 그냥 책 보고 쉬운 코드를 따라 해 한번 ‘쫙~’ 긁어봤습니다. 아무리 내가 기타를 몰라도 이 소리는 도저히 아닌 거 같아 백방에 수소문해보니 기타라는 악기는 ‘튜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제가 유일하게 접해본 악기가 풍금이나 피아노였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미 조율이 다 되어있는 악기니 ‘튜닝’이나 ‘조율’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죠.

생각해보면 꽤나 사려 깊지 못한 중학생이였단 생각입니다.(웃음) 그렇게 차근차근 기타의 튜닝부터 코드, 연주법 등을 익히며 기타를 어느 정도 연주할 실력이 되면서 저는 밴드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음악 하거나 악기 연주하는 친구들을 찾아다녔고 그중에 드럼 치는 ‘김학인’이라는 친구를 섭외해 기타와 드럼으로 조합된 2인 밴드를 만들었는데 제대로 된 연주 한번 못해보고 팀이 해체되었죠.(웃음)

막연한 동경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꿈으로만 머물지 말고 우선 해보라고 합니다. 요즘 세대는 그게 참 부럽습니다. 제 세대에는 부모님께 기타를 사달라고 졸라야 했고, 드럼이 있어야 했는데 요즘은 좋은 어플들이 참 많습니다.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첫 한발을 내딛는 게 쉬워진 거죠. ‘이 나이에 기타를 어떻게 배워’라고 말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늦지 않았습니다. 저도 최근에 새로운 어플 하나 깔아서 연습하고 있는 걸요. 지금 시작하면 됩니다. 

[윤상, 그리고 페이퍼 모드]

비록 정식 연주 한번 못해보기는 했지만 그때 수소문하며 찾아다녔던 노력을 기억하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여 고등학교 때 비로소 ‘페이퍼모드’라는 4인 밴드를 조직하게 됩니다. 정식으로 합주실을 빌려 합주하며 우리만의 곡들을 만들어냈죠.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멤버들은 대학 입시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페이퍼 모드 역시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저 역시 대학은 꼭 가야 한다는 집안 분위기 때문에 미대 입시학원을 8개월 정도 다녀 미대에 입학을 하기는 했지만,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입학하자마자 휴학하고 다시 음악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기 시작했죠.

갑자기 생각난 건데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그토록 음악을 하고 싶었고 음악을 하겠다고 용기가 생긴 것이 바로 중학교 음악 선생님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느 날 음악시간에 숙제를 내주신 적이 있는데 미리 만들어진 2마디짜리 동기 선율에 맞춰 8마디 정도를 완성시키는 거였죠. 저는 당시 집에 있던 실로폰을 두들겨 숙제를 완성해갔는데 선생님께서 ‘윤상이 너 혹시 피아노 치니?’하시며 아이들에게 제가 해온 곡을 들려주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중학교 시절 칭찬받을 일이 딱히 없었던 저에게는 그 칭찬 한마디가 큰 용기를 가져다주었어요. 그렇게 칭찬을 받아 용기가 생겼을 때 마침 삼촌이 기타를 물려주셔서 음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정말 감사한 칭찬이었다고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윤상, 그리고 김현식]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죠.(웃음) 아무튼 그렇게 휴학을 한 저는 ‘신촌블루스’의 연습실을 드나들며 공연 포스터를 붙이거나 허드렛일을 하며 그분들의 눈에 뜨일 날만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연습실을 드나들며 저 나름대로 몇 곡의 노래를 완성해 데모 테이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테이프를 가까운 선배님들에게 들려드렸어요.

그러다 어느 날 김현식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그중 한곡을 김현식 선배가 직접 부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정말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노래는 바로 ‘여름밤의 꿈’이었고, 몇 달을 기다렸더니 정말 김현식 선배 4집 앨범에 제가 작곡한 노래가 실려 있었습니다. 직접 레코드 가게에서 앨범을 구입하던 저는 눈물이 쏟아져 내릴 만큼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배가 직접 녹음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해서 저의 첫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작곡가 윤상]

그렇게 음악계에 발을 들인 저에게는 더 많은 친구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중 밴드 외인부대에 있던 ‘손무현’이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는데 그 친구와 저는 동갑에 음악적 견해가 많이 비슷했죠. 가장 공감하는 부분은 바로 일본 밴드 ‘안전지대’에 대한 견해였습니다. 당시 일본 음악은 방송 금지였고, 또 공공장소에서 일본 음악이 나오면 안 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선배들도 일본음악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아 저나 손무현 같은 후배 입장에서 선배들과 ‘안전지대’를 얘기하기 어려웠죠. 그 이유에 대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린 일본 음악이 비록 일본어로 되어 있는 음악이라 할지라도 결국 서양 음악이라 생각했습니다. 일본 고전음악이나 전통음악도 아닐뿐더러 누가 들어도 영미 팝음악의 정서를 통해 만들어진 음악이었으니까요.

당시 일본 음악 프로듀서 중 ‘디스코’나 ‘펑크’ ‘R&B’를 아시아적 스타일로 재해석해 큰 인기를 얻은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음악에 통해 서양과 아시아 팝 음악의 정서적 간극을 분석하고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우리만의 음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윤상, 그리고 전자음악]

그때가 마침 세계적으로 ‘미디’의 전성기가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그전까지는 녹음실에서 모든 세션들이 한자리에 모여야만 가능했던 다이내믹한 연주를 컴퓨터 한 대로 가능하게 된 것이죠. 이 시기가 저는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라 생각합니다.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가 저의 프로듀서 입봉작인데 그 앨범에 담긴 전곡을 손무현의 기타를 제외한 모두 ‘미디’와 ‘리듬 머신’만으로 만들어냈죠. 정말 타이밍이 좋았어요. 제가 프로듀서를 꿈꾸기 시작할 때 MIDI 시장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저에게 있어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80년대 후반부터는 고가의 악기로 만 구현할 수 있는 소리를 더 싸고 간편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에 ‘윤상 1집’의 모든 곡은 롤랜드 시퀀서 MC500 과 드럼머신 ‘R8’ 로 만들어냈습니다.

기술이 뮤지션들에게 정말 큰 자유를 선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소리를 혼자 힘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건 전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없던 사운드로 더 많은 곡을 더 빠른 속도로 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미디’와 ‘미디 장비’로 중무장한 저는 꽤 많은 곡을 만들고 프로듀싱할 수 있었습니다. 90년대 초 가격이 반 이상 내려간 샘플러도 큰 몫을 했죠. 3년 사이에 라디오 DJ를 하면서 제 앨범을 3장이나 발표했으니 정말 엄청나게 작업에 몰두했던 시절이었죠. 그러던 저는 1993년도에 군 입대를 하게 되고 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하니 1996년 봄 이였습니다.

[윤상, 그리고 유학]

그 사이에 저의 음악에 대한 견해도 많이 바뀌어가고 마음속은 말 그대로 과도기였습니다. 그전까지는 어떻게 보면 접근성이 쉬운 대중적 노래들을 만들었다면, 군 복무를 마치고 난 저는 상업적인 음악보다는 좀 더 나만의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결과일 수 있지만 그렇게 발표한 앨범들은 이전 앨범과 비교할 수 없는 상업적 실패로 이어졌고 저는 음악시장의 현실을 그때서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상업적 실패와 무관하게 ‘더 이상 앞으로 가고 싶은 방향이 보이지 않아’ 라는 생각도 몇 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결혼을 할 무렵, 아내의 동의를 얻어 보스턴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버클리음대에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4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도 마음속 아쉬움이 다 해소된 것 같지 않다고 느껴 다시 뉴욕대학원에 들어가 3년 동안 학업을 이어나갔죠.

세계적인 명문에서 좋은 선생님들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동료들 사이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받고 음악의 깊이를 체험한 건 분명 큰 자양분이 됐습니다. 여기에 더해 유학 생활에서 제가 얻었다고 느낀 건 첫째로 ‘소통’ 입니다. 어린 시절 길지 않았던 경력으로 큰 성공을 얻었었고. 어찌 보면 음악적인 고민을 핑계로 저와 가까운 이들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주면서 살아오다가 나를 있게 해주는 주변에 대해 더 들여다 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대학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생겼을 때도 ‘소통’의 가치를 배운 것이 큰 힘이 됐습니다. 음악 안에서도 그 목표가 모두에게 똑같은 것이 아니듯, 다양한 학생들과 어울리며 음악을 떠나 소통하며 결국 음악은 사람을 위한 것이고, 소통을 통해 사람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함도 알아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마음속에 남아 힘이 들 때도 이게 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용기’ 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원을 마칠 무렵 한국에서 KBS 라디오와 여러 섭외가 이어지기 시작했고, 저는 라디오 DJ를 기점으로 다시 한국에서의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으로 귀국을 하게 됩니다. 원래는 제가 먼저 한국에 오고 몇 년 뒤에 가족이 모두 한국에 올 계획이었지만 둘째가 태어나고, 또 초등학생인 큰 아들의 교육문제 때문에 결국 가족은 미국에 남기로 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활동하며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환경을 선택하게 됐고요.

가족과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안타까움과 그리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해야 하고 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그 때 배운 ‘용기’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게 끝은 아니니까요. 준비한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는 늘 오니까요.

[윤상, 마지막 메시지]

저의 마지막 메시지는 ‘슈퍼밴드’라는 프로그램과 함께 한 이야기 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이 실력을 겨루고 어떻게 보면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야만 하는 냉혹한 오디션 현장을 담아내고 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람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이미 연주 실력이 검증된 인재들이 참가해 경합을 벌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에서 탈락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음악적 재능이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기에 오히려 결과와 관계없이 함께 음악을 할 멋진 파트너를 만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니까요.

힘들겠지만 결국 방송을 통한 대중의 평가에 변명을 달지 않고(그것이 얼마나 진심에서 떨어져 있다 해도) 침묵을 지키며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방송은 그 순간의 분위기를 우리에게 보여줄 뿐 한 사람의 음악적 재능을 평가하는 마지막 시험대가 절대 아닙니다. 방송에서 보여진 것이 전부도 아니고 그 뮤지션의 한계도 아닙니다. 누군가 여러분의 음악을 듣고 마음의 위안을 얻고 공감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 음악시장은 어느 때보다 화려해보입니다. 하지만 그 ‘음악’ 안에는 단순히 음악으로 설명되지 않는 다양한 매력과 가치가 필요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이 더 치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매력을 가졌는지 알아가고 발견해가는 과정이 더 많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 과정은 비단 자신의 매력과 가치의 발견 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더 깊이 있고 성숙하게 만들 거라고 믿습니다.  

음악인으로 살아가고자 결심한 모든 분들이 꿈을 이룬 미래에는 한국음악시장이 지금보다 더 성숙하고 성장한 무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이번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저 역시 항상 여러분의 꿈과 미래를 응원하고 지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