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Interview] 김종진

[김종진]

김종진은 1986년 ‘김수철과 작은 거인’의 기타리스트로 데뷔했다. 그 후 김현식(보컬), 유재하(키보드), 전태관(드럼), 박성식(키보드), 장기호(베이스)와 함께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하며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87년에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기타리스트를 맡으며 뮤지션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988년 드러머 전태관과 함께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해 당시에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기타와 드럼으로만 구성된 2인조 밴드가 탄생하게 됐다. 또한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접하기 힘들었던 독특하고 감미로운 퓨전 재즈 스타일의 세련된 기타곡들은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1992년에는 미국 현지에서 녹음 작업을 한 정규 3집을 발표했으며 ‘1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 ‘아웃사이더’등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후에도 꾸준히 ‘봄여름가을겨울’의 이름으로 앨범을 발표했으며 김종진은 ‘Bravo, My Life!’ 등 숱한 히트곡을 작곡하며 대한민국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그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다.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봄여름가을겨울’은 멤버 전태관이 신장암으로 인해 음악 활동을 잠정 중단했고, 2019년 ‘봄여름가을겨울 데뷔 30주년 헌정앨범’인 ‘친구와 우정을 지키는 법’을 선보였는데 이 앨범에는 후배 뮤지션인 윤도현, 장기하, 어반자카파, 오혁 등이 참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퓨전 재즈 대중화의 중심에 있던 ‘봄여름가을겨울’의 리드보컬이다 기타리스트 김종진을 만나 지난 30년의 이야기와 앞으로 전개될 그의 인생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눠봤다.

[김종진,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렇게 오랜만에 인터뷰로 인사드리려 하니 떨리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네요. 먼저 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신 ‘레전드 매거진’과 ‘사운드캣’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저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대한민국 모든 음악 팬 여러분들께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네요.

올초 데뷔 30주년 공연을 했는데 사실 저는 지금까지도 그 무대 위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에요. 그만큼 그 무대가 저에게는 큰 의미였습니다. 저와 함께 호흡하고 진정 저의 음악을 즐겨주셨던 관객 여러분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음악을 30년이나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지금까지도 음악을 하고 있는 제모습을 볼 때면 스스로 감개무량하고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니까요. 그렇기에 이번 30주년 콘서트는 저에게 더욱 특별했습니다. 주변에서는 ‘그래도 30주년인데 조금 큰 공연장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도 말씀해 주셨어요.

하지만 저는 ‘어떻게 하면 팬분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감사한 마음을 전할까’를 고민했고 그렇게 작은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를 30년이라 사랑해주시고 기억해주시는 분들에게 먼발치에서 노래를 들려드리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저를 지켜주고 계셨는데 당연히 저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죠.

공연에서는 지금까지 여러분이 가장 사랑해주셨던 곡들을 추려서 60곡 정도를 연습을 했어요. 기 이유는 제가 준비한 곡 외에 여러분이 듣고 싶은 노래를 즉석에서 불러드릴 수 있게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싶었던 거죠. 2019년 분위기에 맞게끔 편곡을 하기는 했지만 30년 전 당시 감성과 정서를 담아내는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편곡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대중들이 기억하고 있는 추억이 참 소중했구나’라는 회상에 빠질 수 있는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준비해 한 공연에 20곡 정도 연주를 한 거 같은데 단 한 번도 똑같은 공연이 없었다 기억할 만큼 매 공연이 저에게는 색다르고 새롭게 느껴졌어요. 준비한 60여 곡 중에 실제 연주한 곡은 한 40여 곡도 안 되는 거 같아요. 이는 여러분들도 저의 공연에서 듣고 싶은 곡이 한정되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죠. 사실 저는 1집에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이나 ‘방황’등 지금까지 무대 위에서 거의 연주하고 노래하지 않았던 다양한 곡을 준비했는데 관객분들께서는 그 곡들을 신청해주시지는 않더라고요. (웃음)

제가 좋아하는 곡과 여러분이 좋아하는 곡이 많은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만 반면 다른 점도 있다는 것을 이번 공연에서 느낄 수 있었어요. 제가 공연을 마치고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해봤는데 제가 스스로 내린 결론은 아마도 30년이란 시간 동안 ‘시간의 채’란게 존재하지 않았나 싶어요. 이 채가 제가 만든 음악들을 무려 30년 동안 거르고 걸러 진정 여러분께 사랑받는 곡들이 대중들 마음에 자리를 잡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걸러진 음악이 무려 40여 곡이 된다라는 것만으로도 음악인인 저에게는 무한한 영광이자 큰 기쁨입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30년]

사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저 역시 30주년 공연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고민했던 부분은 바로 ‘공연장’이었습니다. 주변에서 ‘그래도 30주년인데’라는 말씀을 들을 때면 저도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에요. 왜냐면 정말로 30년이란 음악 생활을 한 저 자신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었고, 우리 전태관 씨에게도 큰 선물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었거든요.

하지만 반면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관객분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호흡할 수 있는 장소를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는데 미국에 ‘Daryl Hall’이라는 아주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있어요. 그는 보통 최소한 몇만 명이 입장할 수 있는 공연장에서만 공연할 만큼 명성이 대단한 사람이었죠. 저작권 수입만 해도 어마어마한 인물인 그가 어느 날 자기 집을 개조해 작은 공연을 여는 ‘Daryl’s House’라는 공연을 연다는 뉴스를 보게 됐죠. 뉴욕 인근에 위치한 150년 된 자신의 집에서 작은 콘서트를 열고 그 영상을 대중들에게 무료로 볼 수 있도록 서비스까지 하는 거였어요.

지금 미국 음악계를 주도하는 신세대 뮤지션들과 함께 마련한 그 공연을 만약 제가 현장에서 본다면 아마 저는 미칠 것 같더라고요. 제가 비록 ‘Daryl Hall’ 같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뮤지션은 아니지만 이런 공연을 하게 되면 우리 팬분들에게 소중하고 큰 선물이 되겠구나 생각했고 그렇게 이번 30주년 공연을 작은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 즐기며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소년 김종진]

저는 공연을 마치고 ‘아, 이렇게 30주년 공연을 마쳤구나’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난 세월 음악과 함께 살아온 제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대기실 소파에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인간 김종진’의 흔적을 찾아 나섰습니다.

제가 음악을 하겠다고 부모님께 처음 말씀을 드렸던 중학교 3학년 시절의 제 모습이 보이더군요. 그때만 해도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음악 하는 것을 ‘딴따라’라 취급하던 시절이었기에 저 역시 부모님께 무지하게 혼쭐이 났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웃음)

사실 부모님께 음악인의 길을 걷겠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이 중학교 3학년 때이지, 사실 꽤 오래전부터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마음속에 품고 있었죠. 그게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72년 경일 텐데 당시 저희 형이 취미로 기타를 자주 쳤어요. 저는 기타를 연주하는 형의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며 ‘참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악기구나’ 생각했죠. 형은 저에게 코드 잡거나 기본적인 연주법을 조금씩 가르쳐주기는 했지만 냥 재미 삼아 배우던 그런 정도였어요.

그러다 일본에 있던 저희 누님이 일제 클래식 기타를 하나 보내준 적이 있어요. 저는 그 기타를 만지작거리며 형의 어깨너머가 아닌 제 스스로 처음 기타라는 것을 잡아볼 수 있었죠. 기타를 잘 치지도 못했는데 그 기타를 손에 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저는 너무나 즐거웠고 흥분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게 기타라는 아름다운 친구가 제 손을 잡아준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저희 집에 세 들어온 아저씨가 나이트클럽에서 기타 치는 뮤지션이었던 거예요.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제가 듣기로는 그 당시에는 꽤 유명한 기타리스트였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그 아저씨가 밴드 마스터다 보니 한 예닐곱 명 되는 형들이 매일 집에 와서 골방에 틀어박혀 뚱땅뚱땅, 탁탁탁 하고 있더라고요. 방에는 악기가 없으니 방바닥을 드럼이라 두드리고 입으로 ‘빠빠빠~~~’ 브라스나 코러스 섹션 소리를 내기도 하고 아무튼 재미있었어요. (웃음) 코미디 프로에서나 볼법한 일들이 그 단칸방에서는 매일 벌어지고 있었죠.

어느 날 그 아저씨가 연주하는 기타를 함께 닦아드리며 이런저런 것을 배우게 되었어요. 아저씨가 기타 줄을 교체하는데 아저씨가 ‘이게 3번 줄이고 저게 4번 줄이야’하며 기타 줄을 새로 바꾸는 것도 알려주셨구요. 줄을 다 교체한 다음 튜닝을 하는 것까지도 알려주셨는데 당시 저로서는 튜닝이란 걸 도저히 이해할 만큼 기타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지라 까먹고 말았지만요. (웃음)

그렇게 아저씨와 친하게 지내다가 우연히 아저씨가 일하는 이태원의 한 나이트클럽에 놀 겸 따라갔어요. 아저씨는 대개 오후 5시쯤부터 6시간 정도 그곳에서 일을 했는데 저는 밤 10시 정도까지 아저씨의 공연을 구경하다가 먼저 집에 왔죠. 아저씨들 일이 너무 늦게 끝나니 저는 최대한 제가 즐길 수 있는 만큼 즐기고 먼저 들어왔어요. 그렇게 몇 번을 따라다니다 보니 그때 저는 음악을 해야겠다 말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이미 마음은 뮤지션이 되어있던 거예요. (웃음)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였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음악과 함께 하는 시간이 흘러갔고, 어느 날 아저씨는 저에게 흑인 음악을 하나씩 알려주기 시작했어요.

[김종진, 그리고 음악]

당시 나이트클럽에서는 춤을 추는 음악으로 블루스나 재즈 등 흑인음악을 연주하는 일이 많았어요. 저도 귀동냥으로 듣기는 했지만 그게 블루스인지 재즈인지 흑인음악인지는 알지도 못했죠. 그렇게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마음속에 ‘음악인’ 그중에서도 ‘기타리스트’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죠. 중학교 3학년을 마칠 무렵 이제 고등학교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됐죠.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대학을 많이 가던 시절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대부분 빠른 취업을 위해 공업고등학교나 상업고등학교로 진학을 많이 했죠. 저 역시 저의 미레에 대한 계획을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저는 일단 공고에 진학해 용접 기술을 배우겠습니다’ 말씀드렸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은 저를 ‘기특한 아이’라 생각하셨는지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 미소에 힘을 얻어 저는 ‘고등학교에서 용접 기술을 배워 미국 최대의 공업도시 디트로이트로 건너가 세계적인 기술자가 되겠습니다’ 말씀드렸어요.

저희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성만의 대상이자 꿈을 이룰 수 있는 그런 나라였기에 부모님은 더 밝은 미소를 저에게 보여주셨어요. 저는 밝아지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정말 큰 용기를 얻어 ‘낮에는 용접공으로, 그리고 밤에는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저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적인 기타리스트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저에게 희망을 주던 부모님의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곧 저는 저의 뺨을 매섭게 후려치는 아버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정신없이 밤새 뚜드려 맞았죠. (웃음)

제가 고집이 워낙 세기도 했고, 또 미래에 대한 계획도 어느 정도 세운 상태에서 말씀을 드려서 그랬는지 아버님께서 어느 정도 저에게 양보를 해주셨어요. ‘그럼 음악을 하고 싶으면 일단 대학에 진학해라. 대학에 가면 음악을 할 수 있게 해 주겠다’라 말씀하셨고, 저는 바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웃음) ‘음악’이 저를 대학생으로 만들어 준거였죠.

그렇게 저는 일단 진짜 음악인이 될 준비를 마치고 음악인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저는 기타리스트 ‘한상훈’씨를 만나게 됐고, 그 인연으로 1985년경에 김현식 형님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그전부터 이미 김형식 형님의 팬이었어요. 방배동 카페에서 처음 현식이 형님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만남조차도 저에게는 무한한 영광이었는데 현식이 형님은 그런 저에게 ‘나랑 같이 음악 할래?’ 하시는 거예요.

저는 순간 숨이 막히고 머리가 터질듯한 기분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현식 형님이 나에게 음악을 하자고 한다?’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죠. 현식 형님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저에게 “장기호랑 박성식이랑 군대에 있으니 같이 한번 해보자”라며 쐐기를 박아주셨어요. (웃음) 하지만 정말 좋은 기회였음에도 여러 가지 상황이 허락되지 않았는지 현식 형님과 함께 음악을 하지는 못했어요. 대신 저의 소문을 들은 ‘김수철’ 형님이 ‘김수철과 작은 거인’에 저를 기타리스트로 합류시켜주셨어요. 김수철 형님은 팬을 넘어 제가 가장 존경하는 기타리스트였습니다. 이런 기회가 저에게 주어졌다는 것 마저도 저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김수철과 작은 거인’으로 활동한 지 4개월 남짓 됐을 때 다시 현식 형님이 저에게 합류를 제안해주셨어요. 애초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처라 저는 수철 형님께 “형님, 제가 원래 현식 형님과 함께 음악을 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여기를 잠시 떠나도 될까요?” 여쭤봤는데 쿨가이 수철 형님은 너무나 흔쾌히 OK 해주셨고, “현식 씨니까 믿고 보내니 거기서 꼭 크게 돼라”며 응원까지 해주셨습니다.

저는 현식 형님과 음악을 하며 음악적 감수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현식 형님의 노래가 애절하잖아요. 그냥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애절한 마음을 가지고 부르니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때 갖게 된 감수성 때문인지 저는 지금까지도 ‘아웃사이더’나 ‘어떤 이의 꿈’, ‘바나나 셰이크’ 같은 템포 있는 노래를 할 때에도 애잔함을 담아 노래하게 돼요. 이 노래들이 절대 절절하게 부를 필요가 없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애절한 마음을 담아 부르다 보니 대중들 사이에서 마저도 이 곡들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웃음)

정말 제가 애절함을 최고조로 느끼는 곡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저희 7집에 있는 ‘헤어지던 날’이란 곡이에요. 이 곡은 유일하게 태관이의 드럼이 빠져있는 곡이기도 하죠. 누구나 인간은 헤어지기 마련이잖아요. 그런 이별을 미리 예견하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이자, 그리고 헤어질 때만은 웃으며 헤어지자 이런 내용을 담아낸 곡입니다. 일단 태관의 드럼이 없다는 것도 너무 애절하고, 또 정재일 군이 콘트라베이스로 저와 단 둘이 협연을 한 곡인데 지금 들어도 너무나 애절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참 애절하게 생각하는 연주곡이 있는데 ‘외로움의 파도’라는 곡이에요. 이 곡은 라틴곡인데 태관이가 원래 라틴리듬 연주를 진짜 절묘하게 잘해요. 예전에 한국에 제대로 된 라틴리듬을 구현하는 드러머가 없었을 때, 태관이가 라틴리듬을 도입했고 완성시켰어요. 지금도 라틴리듬을 제대로 연주하는 국내 연주자는 한두 명이나 있을까 하죠. 저는 이 곡을 태관이에게 들려주며 ‘태관아, 이 곡은 너한테 바치는 곡이야’라고 얘기하고 태관이에게 헌정하는 곡으로 만들었죠. 지금 생각하면 또 제목은 왜 그렇게 애잔하게 지었는지 참 너무 가슴 저미는 곡으로 남아있네요.

[김종진, 그리고 전태관]

태관이가 원래 연습벌레거든요. 연습실에서 한번 앉으면 끊임없이 연습에만 몰두했죠. 사람들이 다 가고 나서도 혼자 남아 밤을 새운적도 허다합니다. 그렇게 홀로 앉아 끊임없이 연습하는 태관이의 모습이 마치 하염없이 모래밭과 절벽을 내려치는 파도와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거 같아요. 그런 느낌이 교차해 이 곡은 태관이를 위한 곡이다라고 결정을 하게 되었죠.

저는 태관이를 생각하면 슬픔보다는 외로움이 먼저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음악인들이 그렇겠지만 자기만의 음악 세상에 빠져있다 보니까 대인 관계나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에요. 저 역시 그런 사람이었고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태관이만은 달랐어요. 태관이는 사람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항상 자신보다는 남이 우선이었죠. 음악인이다 아니다를 떠나 하나의 인간으로 봤을 때도 드문 그런 배려심 가득한 인간미 넘치는 우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태관이 뛰어난 사회성과 대인관계가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기하기도 했어요. (웃음)

이런 장점을 태관이는 저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는지 항상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어요. ‘니가 음악으로는 좀 뛰어날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음악을 하는 존재이고, 사람들이 우리 음악을 안 들어주면 우리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다’라며 ‘그러니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춰 그들을 이해하고 마음과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해’라고 자주 얘기했어요.

그런 태관이의 이야기들은 점점 저 자신을 바꾸어놓았어요. 저는 활동 초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내가 잘할 수 있는 음악만을 위주로 만들었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어느새 저는 사람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 있었어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가장 대표적인 곡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중장년에게 힘을 주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 자체가 태관이가 저에게 준 커다란 선물이기도 하죠.

저와 오랫동안 함께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태관이는 참 너무나 대단한 친구라고 생각해요. 태관이는 저와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적 철학을 어떻게 확립해야 할지를 고민하던 친구였습니다. 그런 태관이의 노력은 봄여름가을겨울이 음악적으로 성장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어요. 여담이지만 보통 대기업들은 모두 그 기업들만의 경영철학 같은 게 있잖아요. 우리 봄여름가을겨울의 철학은 ‘사람들이 새로운 음악을 접할 때 느끼는 두려움을 없애자’였습니다. 서로 구두로만 얘기하던 거라 한 문장으로 만들려니 꽤 어색하네요. (웃음)

이 철학을 좀 풀어얘기하자면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음악과 장르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듣던 노래만 반복해서 듣기 마련이죠. 새로운 노래를 찾으려 해도 자기가 선호하는 장르에 국한해 새로운 가수나 밴드, 음악을 찾아다니기 마련입니다. 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록을, 댄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새로운 댄스를, 또 발라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새로운 발라드만을 찾는 게 대부분이죠.

음악의 세계는 무성한 나무 사이로 그 모습을 감추고 있는 정글과 같습니다. 정들 탐험을 도전하는 사함들이 많지 않듯이, 음악 역시 그 속을 파헤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 모험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죠. 마치 타잔처럼 외줄에 몸을 싣고 허공을 질러 날아다니기도 하고 또 맹수에 맞서 싸우며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야 하는데 말이죠. 우리 손에 쥐어진 칼 한 자루만 가지고 숲 속을 휘져어 수풀만 걷어내도 바로 한 발자국 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데 그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거예요.

자, 사람들이 분명 다가갈 수 있는 곳이지만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고 조금은 위험해 보인다면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 수풀을 자르고 길을 만들어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던 전혀 새로운 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도록 우리가 수풀을 잘라주는 역할을 하자. 이것이 태관이의 생각이었고 우리 봄여름가을겨울의 철학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숲으로 가길 원하면 우리는 수풀을 잘라 길을 만들어주고, 바다로 가고 싶다고 하면 우리는 작은 뗏목을 만들어 그들을 안전하게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 주자. 거장 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곡을 하나하나 만들어 갔어요.

예전이랑은 전혀 다른 노래. 우리가 막 재즈하고 해 봤자 어차피 우리 음악을 듣는 사람은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철학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으로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우리만 즐기는 음악이 아닌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악.

정글이라는 단어에서 창안해 우리는 엠넷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의 숲’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프로그램은 우리 선배님들부터 후배들까지 한국 음악계를 이끌어 온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시청자들과 함께 공감하는 토크쇼였습니다. 유행하는 농담이나 던지며 서로 웃고 떠들고 하는 그런 토크쇼가 아닌, 정말 한 인물의 삶과 음악 이야기를 진지하고 또 진솔하게 나누며 시청자에게 전하는 방송이었죠.

‘숲’ 인터뷰에 참여해주셨던 아티스트분들 모두 태관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함께 태관이의 명복을 함께 빌어주셨는데, 아마 저와 태관이가 그분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며 인간미적인 교류가 가능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대화하기 편한 얼굴은 아니잖아요. (웃음) 그런데 태관이는 달랐어요. 누군가 자신에게 무슨 얘기를 하면 정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상대방의 말에 완전히 빠져들죠. 그러면 잠시 어색했던 사람도 ‘이 사람은 내 얘기를 다 들어줄 것 같다. 지금도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있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되죠. 그렇게 태관이는 사람의 이야기도 듣지만 그 사람의 마음속 말에 더 집중했어요. 그런 재주가 저는 너무 부러웠죠.

이렇게 남의 얘기를 진심으로 다 들어주었던 태관이 자신은 미처 사람들에게 말 못 할 일들이 많았죠. 4년 전인가 신장암이 어깨뼈로 전이되는 치명적인 상황이었어요. 그때도 태관이는 묵묵히 아들과 함께 자신과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고자 순례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렇게 갔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요.

30년간 같이 활동을 했던 태관이가 도저히 드럼을 칠 수 없어 무대를 내려왔을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태관이 없이 혼자 무대에 선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 어색했고 불안했습니다. 마치 처음으로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의 자전거를 잡아주던 아버지의 손이 자전거에서 떨어졌을 때 그런 느낌이라 할까요? 아버지가 분명 자전거에서 손을 땐 것은 알고 나 혼자 자전거를 몰아 앞으로 나가야 하지만 앞바퀴는 갈피를 못 잡고 끊임없이 흔들거리고 저는 그 자전거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애를 쓰는 그런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김종진, 마지막 메시지]

저는 혼자 무대에 몇 번 서고 나서 결심했습니다. 어차피 나는 이걸 이겨내야 한다. 나 스스로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라는 걸 직감했어요. 그래서 제 아내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나랑 같이 걷자’ 딱 한마디 했는데 아내는 저의 모든 이야기를 이미 다 들은 듯 저의 손을 잡아주었고 오랜 시간 힘들게 걸어야만 하는 순례길을 저와 함께 해주었습니다. 아내는 참 헌신적이고 고마운 사람이에요. 사실 순례길은 힘든 고난의 연속이지만 정말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정입니다. 걷다 보면 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고, 지난 어린 시절부터 지금이 나를 끊임없이 교차시켜가며 ‘내’가 누군인지 알아갈 수 있는 소중한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이번 순례길을 마치고 저는 혼자 당당히 무대에 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관이 없을 때 어린 시절 순수하게 음악을 사랑했던 ‘소년 김종진’의 모습도 다시 만나게 되었구요. 어린 김종진의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지금의 김종진이 그 소년의 꿈을 다시 이루려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은 순수한 마음으로 음악을 하기 힘든 시대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산업이 고도로 발전하며 음악 역시 예술이 아닌 하나의 IT 산업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쉬움만 가득하죠.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실로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수십 명이 한 장소에 모여 수없이 연습해야만 하는 오케스트라 연주도 컴퓨터 한 대로 구현이 가능해졌으니까요. 그 연주자들이 가지고 있는 감성과 연주기법을 완벽히 따라 할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그 수많은 인원이 표출해내는 음악만은 구현은 가능해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과학의 혜택 덕분에 마음으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표출하는 음악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는 거죠. 손가락 끝까지 감정을 실어 혼신의 연주를 하던 노장의 기타리스트의 연주기법도 컴퓨터는 거의 완벽하게 구현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모 피아노 브랜드 회사는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기법을 고스란히 담아 무인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를 개발하기도 했구요. 피아노와 아이패드를 연결해 클릭만 하면 그 연주자의 섬세한 솔길까지 완벽히 건반이 구현하죠. 이런 기술이 퍼지고 퍼지다 보면 그 연주자는 무엇을 하게 될까요? 아마 이 피아노 회사의 소프트웨어에 자신의 연주 곡들을 업데이트해주는 단순 작업에 평생을 바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음악의 산업화는 결국 ‘음악=돈’이라는 아주 비즈니스적이고 단순한 공식을 만들어냅니다. 음악가는 더 이상 예술인이 아닌 음악으로 사업을 영위해 이윤을 창출하는 회사의 노예가 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예전처럼 순수한 음악이 나오기 더 힘든 상황이며, 듣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힐링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음악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죠. 하지만 아직도 그런 것들을 해소해주는 음악 역시 분명히 존재해요.

저는 많은 분들께서 그런 음악에 귀를 기울여주셨으면 해요. 제가 무슨 큰 야망을 가지고 ‘한국 음악계를 뒤집어 놓을 거야, 아니면 난 지금이 싫으니 모두 바뀌어야 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지만 단 오늘 하루를 살아도 진심이 담긴 음악을 만들고 싶고 또 그런 음악이 인정받는 하루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 하루에 충실히 살아가며 내일이 오면 또 그 내일 하루에 충실하려 하는 평범한 한 인간입니다.

가족들에게는 미안하면서 또 잔인한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저 역시 오늘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못 들어 올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스트레스와 욕심도 사라지고. 하루하루를 너무나 감사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거든요. 정말 우습고 유치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저는 이 세상 너머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웃음)

이 신선들은 우리 인간 세계와는 동떨어진 저 먼 하늘 위 구름 위를 걸어 다니며 생활하죠. 구름을 거닐다 서로 만나 행복한 이야기도 하고, 또 자신들에게 정말 가치 있는 이야기를 나눌 거라 생각합니다. 정말로 맛있는 게 뭔지, 가장 멋있는 게 뭔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정말 아름답고 좋은 소리가 뭔지를 다 알고 계시죠. 하지만 그 신선들이 가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내려와 그들이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며 고귀한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인간들에게 전하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그 신선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는 거죠.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누굴까 한 번쯤 찾아보고, 그런 사람의 모습을 한 신선 같은 사람이 내 주위에 있다면 그 사람의 말에 귀를 한번 기울여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들이 우리 인간에게 참되고 바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제시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것들을 외면해 버립니다. 만약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하루가 된다면 여러분은 무얼 하시겠습니까? 출근해 돈을 버시겠어요? 아니면 로또? 오늘이 마지막이란 걸 안다면 돈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멍청한 ‘숫자들의 조합’인지 뼈저리게 느끼실 겁니다. 왜 이 하찮은 돈이란 것 때문에 내가 평생을 바쳤는지 펑펑 울다가 마지막 날을 다 보낼 수도 있고요.

사람들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이 세상을 떠나 어디 다른 세상에 가서 딴살림을 차릴 요량인지 미친 듯이 돈을 긁어모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내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돈이라는 것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딱지’ 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돈을 가지고 있으려는 욕심의 근원은 바로 ‘내일’입니다.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죠. 오늘은 어찌어찌 버텼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나는 그 뭔지도 모를 일에 대비해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멍청스러운 논리죠.

‘돈’이라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오늘 하루를 버틸 돈이 주머니에 있다면 굳이 내일을 걱정하며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라 당부하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첫걸음이 바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오늘을 살아보시는 겁니다. 돈 말고도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시끄러운 괭음을 내며 도로를 세차게 날아가는 오토바이의 소음 소리까지 아름답게 들리실 겁니다. 장담합니다. (웃음)

마지막 메시지가 너무 길어졌네요, (웃음) 제가 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레전드 매거진을 통해 여러분 앞에 섰을 때는 지금보다는 더 당당한 모습으로 더 많은 이야기 전해드릴 수 있는 그런 인간 김종진이 되겠습니다. 이번 인터뷰 자리를 마련해주신 레전드 매거진과 사운드캣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과 가정에 평안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