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캣 인터뷰] SM 프로듀서 홍종화 - 사운드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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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악은 사운드캣으로 통한다

[사운드캣 인터뷰] SM 프로듀서 홍종화

취재: 사운드캣 이준동 국장 <사진제공: 홍종화>

SM

SM의 시작은 1980년대 MC와 라디오 DJ로 활발히 활동하던 이수만이 돌연 미국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로 4년간 유학을 가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이수만은 현역 연예인으로는 최초로 외국 정규대학 유학을 갔고 거기서 미국 팝문화와 MTV에 큰 감명을 받고 연예기획자를 꿈꾸게 된다.

이수만은 1985년 귀국 후 다시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홍종화’라는 작곡가를 기나긴 설득 끝에 섭외했다. 홍종화 작곡의 이수만 1집 수록곡 ‘사랑하고 만거야’가 영화 ‘지옥의 링’ 주제가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이어 홍종화는 이수만 2집 앨범 전곡을 작곡했고 이 중 ‘장미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는 최근 레드벨벳을 통해 리메이크 되며 다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SM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되었고,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SM과 함께 해 온 SM 제1호 프로듀서이자 작곡가 홍종화를 만나 그의 음악, 그의 인생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어봤다.

프로듀서 홍종화

청담동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10여 년 전 ‘사운드캣’과의 인연을 첫인사로 전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2008년 전문적인 커스텀 이어폰 구입을 위해 지인들에게 수소문해 사운드캣을 알아냈고 ‘얼티밋이어스’와 ‘웨스톤랩스’ 제품을 구입해 10여 년간 A/S 한 번 없이 아직까지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어 “최근에는 프로오디오부터 하이파이 하이엔드 디바이스 제품들로 영역을 확대해 나가며 성장해가는 모습이 너무 반가웠습니다”

이렇게 고도화된 하이파이 하이엔드 디바이스 등의 음악기기로 음악을 만드는 시대임에도 반드시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아날로그적 감성’이라며 그와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미래가 4차산업 시대, 첨단로봇시대가 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원래 아날로그한 동물인지라 음악도 아날로그 적인 요소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당연히 음악에도 첨단 기술과 조화를 이룬 기계적인 요소가 분명히 필요하다. 만약 기계적인 요소가 ‘비트’ 또는 ‘패턴’이라 한다면 아날로그적인 요소는 ‘선율’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적합할 것 같다.

하지만 이 기계적인 비트와 패턴마저도 아날로그적인 요소를 담아야 한다. 미국에 있을 때 ‘퍼프대디’(Puff Daddy) 회사와 작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함께 일하던 한 흑인 친구가 2 마디 패턴을 손으로 직접 쳐가며 만들고 있었다. 그 친구는 퀀타이즈도 없이 단 두 마디의 패턴을 만들어내기 위해 밤새 찍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살아있는 패턴을 완성해냈다.

이 패턴으로 완성된 곡을 들어보면 리듬감과 그루브감이 살아 숨 쉰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퀀타이즈와 COPY, PASTE로 만들어진 음악과는 그 본질 자체가 틀리다. 최첨단 기술과 인간의 아날로그적이 결합되어 탄생한 훌륭한 작품의 예라고 생각한다.

홍종화와 음악

그는 5살 때 아코디언과 피아노를 처음으로 배우며 음악을 접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라디오를 항상 들으며 성장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써온 음악일기에는 그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의 분석과 함께 당시의 트렌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면서 음향장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늘 세운상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음향기기를 구경하고 해외 음악잡지 등을 보며 꿈을 키웠다.

하지만 음악을 전공할 생각은 없었다. 전자기기를 좋아했다. 지금은 음악을 하려면 전자기기가 필수지만 그때는 음악이면 그냥 음악이었고 기계는 기계였기에 전혀 연관이 없었다.

전자기기가 좋아 전자공학과를 가려던 중 우연히 친구가 건넨 ‘너는 음악을 좋아하니 음대에 가면 잘 어울릴 것 같다’라는 말 한마디로 생각을 바꾸고 경희대 작곡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

경희대 작곡과에서 대부분 배울 수 있는 음악은 클래식이었다. 당연히 클래식을 좋아하고 클래식은 모든 음악의 바탕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목말라 있었던 것은 실용음악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만 해도 실용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차별이 심했다. ‘문화의 이원론적인 극단적 문화 편 가르기 이론’ 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예로 명문대 음악과에서 클래식을 전공하던 한 학생이 대학가요제 출전했으나 결국 학교 측의  재제를 받았고, 또 다른 성악과 학생이 대학가요제 출전해 금상을 받았는데 결국에는 자퇴를 한 적도 있다. 이런 분위기였다.

결국 그는 개인적으로 실용음악을 공부했다. ‘키보드매거진’ 이라는 일본 잡지를 정기구독하며 일본 음악의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 그리고 ‘카시오페아(Casiopea)’, ‘티스퀘어(T-Square)’ 등의 유명 그룹이 어떤 악기와 장비를 사용하는지, 어떻게 음악을 만드는지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음악적 목마름이 열정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 신디사이저 거장 ‘토미타 이사오’를 동경하며 그처럼 신디사이저로 나는 음악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한다.

토미타 이사오 (冨田 勲)

토미타 이사오는 하나의 섬을 전후좌우 서라운드 5.1 채널로 감싸는 시스템을 구축해 공연을 한 인물이다. 하늘에 헬리콥터를 띄워 스피커를 설치해 하나의 섬에 5.1 채널을 완벽히 구축했다.

홍종화는 “그 당시는 모노폴리 신디사이저 시절이었다. 즉 단선율 밖에 안 나왔다. 당시에는 8트랙 테이프 녹음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며 “8트랙 중 6개만 사용해 녹음을 한 결과물을 나머지 2트랙으로 옮겨 2개의 스테레오 트랙을 만든다. 이러한 작업을 무한 반복하면서 음악을 만들던 시절 이었다”며 그 당시에는 음악 한 곡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열정과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음을 회상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토미타 이사오는 수학선생이었기 때문에 음악 안에 들어있는 소리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계산에 따라 설계했다. 당시에 2채널의 2D 소리를 3D 서라운드로 직접 만들었다.

예를 들면 소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어가면서 모듈레이션이 걸린 상황에서 소리의 변형이 중간쯤 왔을 때 이퀄라이저의 중음대역을 살살 올려주고 빠져나가면 소리가 마치 앞으로 튀어나왔다가 들어가는 느낌을 구사하는 것이다. 여기에 리버브를 WET하게 많이 주고 DRY한 소리를 조금만 가미하면 소리가 뒤쪽으로 퍼져나가는 느낌도 들게 된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일일이 계산해 수작업으로 탄생시킨 인물이다.

트렌드의 성지, 미국으로

이러한 일련의 신디사이저에 대한 동경심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 다가왔다. 대학 선배 권인하와 함께 전자음악 밴드 ‘우리(WE)’를 만들게 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악기를 신디사이저로 연주했다. 드럼, 베이스도 모두 신디사이저로 연주했다.

1990년도 MBC FM 창사 25주년기념 컴퓨터음악 페스티벌의 서곡·피날레및 가수와의 협연을 위한 작곡 및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93년 대전 엑스포의 포항제철(지금의 포스코) 전용관에 3D영상과 함께 나올 수 있는 음악을 7.1채널로 작곡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7.1 채널을 국내에서 만들 수가 없어서 미국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했다.

이 때 미국에서 작업하면서 그는 미국에 대한 문화적인 충격을 받아 NYU 뮤직테크놀로지(컴퓨터음악) 대학원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당시 배웠던 것 중에 가장 기억 남는 것이 ‘스트리밍’ 이라는 것이라 기억한다. 교수님이 앞으로는 이 시스템이 음악 시장을 주도할 것이라고 했으나 당시에는 어떤 시스템인지 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이후 ‘리얼오디오’ 가 스트리밍 서비스를 선보이며 지금의 음악 감상 시스템의 트렌드가 되었다.

다시 한국으로…

한국에 다시 왔을 때 솔직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한국의 문화는 전반적인 모든 것이 긍정적이 부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글로벌한 정보가 한국으로 유입되어 새로운 트렌드가 쏟아졌는데 한국 젊은이들은 그것을 일일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넒은 세상을 보기 위해 미국에 있었지만 그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갈망하면서 변화를 읽지 못했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2003년도 호서대 디지털음악과가 창설되면서 겸임교수로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는 서울예대에 미디를 가르치는 학과가 창설되면서 컴퓨터음악 교육의 붐이 일던 시기였다. 이를 계기로 많은 대학에서 실용음악과가 생기게 된다. 동아방송예술대 겸임교수를 2년전 까지 있었고, 현재는 경희대 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예술경영대학원’에서 대학원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외국인에게 한류의 뿌리와 이론을 가르칠 수 있는 보람된 일이다. 한국 대중음악과 역사 등 한류 트렌드의 과거, 현재, 미래 전반적으로 가르친다. 강의평가가 100점 만점에 97점을 받을 만큼 학생들의 호응도가 높은 것이 가장 보람되는 일이다. 학생들이 필요한 것을 잘 전달한 것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한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다

스승과 제자에서 음악적 동료로 성장한 BTS 메인작곡가 ‘슈프림보이’

음악이던 교육이던 결국에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고 마음과 마음의 공유다. 열심히 한 제자는 어떠한 형태로던 사회에서 인정받는 모습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스승과 제자에서 음악적 동료로 다시 만나게 되기도 한다.

내가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다. “이제는 한 우물 파는 시대가 아니라 여러 우물을 넓게 파보고 그 중에 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찾아 깊게 파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다양한 음악을 즐기고 음악과 함께 놀아야 한다. 음악은 음학(音學)이 아닌 음악(音樂)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항상 겸손 하라’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학생들의 경우 가끔 젊은 힘이 자칫 교만함으로 보일 때가 가끔 있다. ‘나는 잘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타인이 오해하지 않도록 항상 겸손한 인성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많이 경험 하라’다. 음악적 경험만이 아닌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라. 백남준은 현대 음악과 미술, 그리고 테크놀로지를 결합해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고 그것을 음악으로 녹여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길 바란다.

앞으로

그 나름대로 꿈이 있다면 공간에 맞춰 음향을 계산하고 가장 이상적인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하는 ‘건축음향 컨설팅’이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카페나 식당의 경우 각각의 실내 인테리어 특성에 맞춰 이상적인 음향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끔 어떤 곳에 가면 ‘시끄럽다’ 또는 ‘오래 못 앉아있겠다’ 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 바로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유연하게 소화시킬 건축학적인 인테리어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앞으로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 이상적인 음향시스템을 구축하는 건축음향 컨설팅을 그 장소를 찾는 많은 분들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과 사운드를 동시에 제공하는 의미 있는 새로운 일을 만들고자 한다. 아울러, 4차산업에 걸맞는 음악컨텐츠 개발과 AI 디바이스들을 위한 음향설계 또한 진행중이라고 한다.